본문 바로가기
꿈의 이야기

걸음

by 양손잡이™ 2011. 10. 11.
걸음

  할머니는 무릎이 좋지 않으셔서 수술을 받으셔야 했다. 70 평생 할아버지와 함께 논길을 걷고 쪼그려 앉아 자식들에게 줄 것들을 가꾸셨다. 세월엔 장사가 없었다.
  사실 생기지도 않아야 할 병이었다. 무릎이 약간 아프셨을 뿐이다. 의사는 무릎에 주사를 놓겠다고 했고, 할머니는 그 이후로 평상시대로 일을 하셨다. 그 작은 주사바늘로 더 작은 병원균이 들어가는 바람에 할머니는 무릎을 펴지 못하셨다. 무릎은 뜨거워지고, 새빨개지고, 퉁퉁 부어 커졌다.
  당신의 생일에나 가끔 경기도로 올라오셨지만 이번엔 수술을 위해 서울로 오셨다. 각종 검사를 마쳤다. 수술이 불가피했다. 할머니는 4인실에 입원하셨다.
  그때 군 복주 중이던 나는 할머니의 입원을 이유로 휴가를 나오려고 했다. 하지만 중대장은 생명에 큰 지장이 없으니 허락하지 않겠다고 했다. 나이가 많아 수술 자체도 부담이 되고 수술 후에도 별 차도가 없을 것 같다고, 의사 선생님이 말씀하셨단다. 그런데도 침상에 누워서 단지 휴가를 나가지 못했다고 침울해하고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여름에 수술을 마쳤어야 했다. 하지만 할머니의 건강상태가 생각보다 좋지 않아 4인실의 장기 환자가 되시고 말았다. 매일 돌아가며 할머니를 찾아뵙는 며느리들은 참 걱정이 앞섰다. 병원까지 오는데 모두 적어도 한 시간 반은 걸렸다. 아직 등하교를 지켜봐야 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결국 다 큰 자식들을 가진 엄마가 할머니 옆에 주로 앉았다.
  많은 검사와 치료 덕에 드디어 수술을 할 수 있었다. 엄마가 중대장에게 직접 전화를 해 말년 휴가를 조금 잘라 청원휴가를 나왔다. 그때서야 할머니의 나이에 전신마취가 얼마나 위험한가를 알았다. 군복을 입은 채로 병원으로 들어섰다. 그때는, 조금씩 쌀쌀해지는 가을이었다.
  병실에 들어서니 생각과는 다르게 분위기가 좋았다. 엄마와 작은 엄마 두 분이 할머니 옆에 앉아서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고 계셨다. 군복 입은 나를 보며 자랑스러워도 하셨고 할머니 전속 간호사와 연결시켜주려는 노력도 하셨다. 겉으론 웃었지만 속으론, 이 사람들은 왜 이리 들떠있나 생각했다. 나를 빼고 모두는, 온 병실을 가득 채울 정도로 크게 웃었다.
  점심을 먹지 못해 엄마와 병원 구내식당으로 갔다. 밥을 먹고 있는데 옆에 한 노인 분이 바퀴달린 의자에 의지해 걸어오셨다. 들어보니 할머니와 같은 부위를 수술하셨다고 한다. 연세도 할머니보다 많으셨다. 엄마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대화를 계속 하셨다. 그 할머니의 보호자와도 수술 후에 해야 할 일들을 얘기했다. 아직도 기억에 남는 것은, 병원 밥은 참 맛이 없다는 것이다.
  오후에 아빠가 오셨고 우리 가족 셋은 차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붕어빵을 사먹었다. 군인이라 어쩔 수 없는지 단 음식엔 사족을 못 썼다. 꼬리에 팥이 없는 게 참 아쉬웠다. 그래서 사람들은 꼬리를 제일 마지막에 먹는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했다. 그래도 모두 먹었다.
  사흘 후가 할머니의 수술 날이었다. 전신마취 후 깨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의사의 주의를 처음 들었다. 하지만 나를 빼고는 모두 알고 있었다. 병실은 참 조용했다. 매번 병실을 찾아갈 때마다 웃어 재끼던 텔레비전 안의 개그맨은 그날따라 통 보이지 않았다.
  할머니는 계속해서 심호흡을 하시며 수술실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를 탔다. 엘리베이터의 차가운 감촉에 깜짝 놀랐다. 엘리베이터가 3층에 도착했고 문이 열렸다. 그리고 곧바로 수술실의 문도 열렸다. 3층엔 아무도 없었다. 온통 흰색의 공간이었고, 무서웠다. 수술실 안에서 간호사 둘이 걸어 나와 할머니의 병상을 끌고 들어갔다. 손이라도 잡아드려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멍하니 수술실 문 옆에 섰다. 무릎에 열이 많이 나 젖혀둔 담요 옆으로 할머니의 무릎이 보였다. 그날따라 무릎은 새빨갛고 커보였다.
  참 다행이도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마취약이 준 꿈에서 못 헤어나시지 않으셨다. 맛없던 병원 밥도 전보단 잘 드셨다. 며칠 새 머리가 많이 새어 보인 듯했지만 그래도 전보다는 나았다. 안심하고 부대로 복귀했다.
  하지만 엄마에게 전해들은 이야기로는 상황이 썩 좋지 못했다. 식당에서 대화를 나눴던 분과 달리 할머니의 회복이 더뎠다. 전의 감염이 생각보다 심했다고 한다. 그래도 점점 나아지고 있으니 걱정은 말란다. 수화기를 들고 있던 그때는 정말 걱정이 많이 됐다. 하지만 말년에 훈련과 사열, 그리고 전국을 휩쓴 신종플루덕에 매우 바빴다. 전역을 제 때 할 수는 있을까라는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했다. 다행히 별 지장 없이 전역할 수 있었다.
  집으로 오니 나를 맞이한 사람은 할머니셨다. 수술 후 병실에서 치료를 하시다가 상태가 많이 호전돼 집에서 맏이네 집에서 요양 중이셨다. 기쁜 마음에 할머니 목소리가 들리는 안방으로 들어갔다. 굽혀지지 않는 다리를 쭉 펴시고, 일전에 다치신 허리도 쭉 펴시고, 참 어색한 자세로 침대에 앉아 계셨다. 머리는 수술 후보다 훨씬 새어있었다. 창밖에서 비쳐오는 햇볕을, 흰머리는 환히도 반사했다.
  엄마의 말대로 할머니의 무릎은 상태가 썩 좋지 않았다. 붓기가 가라앉았어야 할 시기인데도 불구하고 수술부위는 퉁퉁 부어 있었다. 쪼글쪼글한 손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이었다. 너무 커져 피부가 반짝이기까지 할 정도였다. 식사를 하러 가시는 그 짧은 길에도 바퀴의자에 의지하셨다. 조금 걸으시면서, 또 고무 밴드를 이용해 운동을 하시면서 무릎에 열이 가득 찼다. 10m도 되지 않는 거리를 걸으시고는 얼음으로 무릎을 마사지 하셨다. 엄마가 목욕이라도 시켜드리려 하면 욕실에서 한참을 나오지 않으셨다. 그곳에서도 찬물로 무릎을 매만지시곤 했다.
  움직이시지를 못하니 하루 종일 안방에만 계셨다. 허리 때문에 앉는 것도 힘드셨다. 좋아하시던 텔레비전도 자의로 트신 적이 없었다. 가만히 누워 천장의 벽지를 바라보고 계셨다. 넓은 베란다 창으로 한껏 들어오는, 겨울의 냉기 섞인 햇볕을 가만히 쬐고 계셨다. 가끔 안방에서 신음소리가 들리곤 했다. 아프신 곳이 무릎인지, 아니면 우리가 모르는 다른 곳인지는 알 수 없었다.
  상처란 자연히 아물듯이 할머니의 무릎도 점점 좋아졌다. 물론 논밭에서 일하실 때만큼은 아니었지만 이전보다 훨씬 긴 거리를 걸으실 수 있었다. 여전히 바퀴의자를 앞세우셨지만 아파트 단지를 걸으시며 운동을 하셨다.
  겨울바람은 한없이 날카롭다. 하지만 할머니는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한사코 걸으셨다. 모자 끈을 질끈 동여매시고 마스크도 쓰셨다. 양말도 두 개나 신으셨고 고모가 산 분홍빛 점퍼도 입으셨다. 그리고 나와 함께 아파트를 나서셨다.
  우리 동네는 풍동이다. 단풍 풍자를 쓰지만 바람이 많아 바람 풍자가 아닐까라는 농담도 하곤 했다. 산 위에 지어진 아파트 단지 사이로 불어오는 날파람은 꽤나 아팠다. 그런 바람들 사이로 할머니는 힘겹게 걸음을 떼셨다.
  수술실 앞에서도 멀뚱히 서 있기만 했던 손주는 이번에도 할머니의 뒤에 서 있었다. 자기의 고난은 자기 힘으로 극복해야 진정한 해방이라고 생각하던 때였다. 할머니의 앞에서 바람을 막기는커녕, 심지어 옆에 서서 부축은 못할망정, 그렇게 안방에서 지내시며 움츠러든 마음처럼 굽은 등을 따라 걸었다. 
  비치적거리면서도 할머니는 계속 걸으셨다. 인생의 끝자락에서 주저앉지 않고 끝까지 걷고 싶으셨나보다. 첫째 목표는 운동이셨겠지만 실상은 할머니의 피부 위로 쌓이는 안방의 먼지를, 아프지마는 바람으로나마 날려 보내고 싶으셨던 건 아니었을까. 먼지뿐 아니라 다른 것도 함께 말이다.
  그렇게 우리 집에서 지내신지 세 달, 할머니는 당신의 집으로 돌아가셨다. 푸세식 화장실이 있던 집에 좌변기가 들어섰고 큰방에는 방만한 침대가 들어섰다. 할아버지도 할머니를 대신해 밥도 차리시고 설거지도 하셨다. 무엇보다도 그곳엔 안방의 무거운 먼지가 없었다.
  그해 추석, 시골에 내려갔다. 할머니의 머리는 여전히 흰색이지만 훨씬 윤기가 흘렀다. 얼굴은 이전만큼 혈색이 도시고 바퀴의자 대신 지팡이가 동행친구가 돼 있었다. 요즘에는 매일 언덕 아래 마을회관에 놀러 가신다고 한다. 여전히 쪼그려 앉지는 못하셨지만 그 정도까지의 쾌유를 바란 건 아니었다. 그리고 할머니의 등은 아름다웠다.
  집으로 올라오는 길에 휴게소에 잠시 들렀다. 가을인데도 붕어빵을 팔고 있었다. 두 봉지를 사서 가족에게 갔다. 이 붕어빵에도 꼬리엔 팥이 없었다. 항상 마지막에 먹는 꼬리부분이다. 모두가 꼬리는 맛이 없다고 불평을 할진 몰라도 버리지는 않는다. 꼬리도 꼬리 부분의 맛이 있고 그렇기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반응형

'꿈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응답하라 2000  (0) 2014.01.05
내가 개를 싫어하는 이유  (0) 2012.02.04
휘갈김 1  (0) 2011.09.18
음악이 돈다  (0) 2011.05.23
어제에 기대어  (0) 2011.05.22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