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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이야기/독서 노트

밥은 온기다 - 그래도 나는 당신이 달다 (변종모)

by 양손잡이™ 2013. 5. 24.
그래도 나는 당신이 달다 - 6점
변종모 글.사진/허밍버드



048.


공대생 유머.

공대생은 인사로 이 세 마디를 한다. 과제 했냐? 저 여자 예쁘지 않냐? 밥 먹었냐?


남자 이야기.

나중에 밥이나 한 끼 먹자 해놓고 먹는 일이 없다.


엄마 이야기.

자식이 밥을 많이 먹어도 더 먹이고 싶다.


회사 이야기.

점심시간에 맛난 점심을 먹으면 계약성립이 수월해진다.



  모두들 매일 밥을 먹는다. 모종의 이유로 안 먹기도 하지만 결국은 다른 형태로 어떻게든 먹는다. 배고플 땐 사나워지지만 점심시간에는 매일 화만 내는 상사도 잠시 인자해진다. 식욕은 기본적인 욕구 중에 생명을 이어가는 데 가장 중요하다. 아무리 바빠도 밥 먹고 하자는 외침에 다들 자리를 뜨고, 아무리 미운 상대라도 밥은 먹고 다니냐며 걱정스런 질문을 하기도 한다. 학창시절 학교에 지각이라도 할라치면 어머니는 외치셨다. 밥은 먹고 가야지!


  여행 에세이집 <아무도 그립지 않다는 거짓말>, <여행도 병이고 사랑도 병이다>를 쓴 변종모가 새 에세이집을 꾸렸다. 여행과 그리움이라는 기본적인 테마를 깔고, 이번에는 독자에게 특별히 밥을 차려주었다. 기존의 에세이집이 다른 이들과의 관계와 에피소드, 낯선 곳에서 문득 생각나는 그리운 사람, 처음 보는 장면에 대한 찬탄을 다룬다면, 이번엔 낯선 길에서 낯선 이와 함께한 식사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낸다.


  낯선 길 위에서 혹은 몸이 지친 어느 날들에는 자주 생각날 것이다. 이제, 다시는 먹을 수 없을 그 과일 물김치가 자주 생각이 날 것이다. 나에게 그것은 어린 시절 달콤한 물약 같은 만병통치약. 어머니의 과일 물김치는 내게 반찬이 아니라 약이다. _69쪽


  변종모뿐 아니라 모두에게 밥은 향수와 같다. 우리의 머릿속 추억에는 몇 가지 음식이 있기 마련이다. 어릴 적 어머니의 음식은, 지금 보면 별 거 아녀 보일 수 있다. 인생을 살면서 그것보다 훨씬 값비싸고 으리으리한 음식을 많이 먹기 마련이다. 하지만 우리는 어린 시절 먹었던, 그 단촐해 보이는 음식의 맛을 잊지 못하고 평생 맛의 세계를 겉돈다. 다이나믹 듀오도 어머니의 된장국을 그토록 부르지 않았는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음식 냄새를 맡자 그에 대한 기억이 떠오르듯이, 밥에 관한 기억은 추억을 부른다. 그리고 그 추억은 무의식 저 아래에 있던 사람과 감정을 끄집어낸다.


  처음 보는 당신이 나에게 밥은 먹었느냐고 따뜻하게 물었을 때, 나는 비로소 두고 온 곳의 내 소중한 사람들을 뜨겁게 떠올렸다. _프롤로그


  변종모는 요리사가 아니다. 음식을 먹는, 일상적인 사람일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음식 얘기를 쓰면서도 음식에 대해서만 말하지 않는다.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써서 다소 늘어지는 느낌이 든다. 다만 자신의 추억담이 아닌 다른 사람과의 식사에 대한 이야기라는 점이 흥미롭다. '이유 없이 좋아하다 보면 끝내 이유가 생긴다', '내가 잠시 당신에게 빈 그릇이었나 보다'라는 문장들은, 긴 산문 속에서도 빛을 발하는 문구다. 그렇게 맛있게 먹던 짜이(인도식 밀크티)가 사실 갠지스 강물로 만든다는 걸 봤을 때 느낀 당혹스러움에선 유머와 동시에 성찰이 느껴진다.


  밥은 생명이고 온기다. 아무리 가난한 사람이라도 마음 속에 따뜻한 부엌이 있다. 밥을 먹을 땐 말을 많이 하지 말라고 한다. 같이 밥을 먹는 그 순간만큼은 마음의 온기를 조용히, 또 온전히 느껴보라는 말이 아니었을까. 차린 건 많이 없지만 많이 드세요. 제 마음입니다. 누군가의 말없는 속삭임이 들린다.



  잠들지 못하는 밤,  P는 지나간 사랑 이야기를 검은 천장 위로 쏟아내곤 했다. 사랑이 지나간다는 것, 지나가고 있다는 것이 그렇게 검은 천장 같은 아득한 것이라는 것을 나는 직감하지 못했으므로 그저 들어주기만 하던 날들. _28쪽


  KKH의 그 높은 도로 위에서 중년의 남자들이 허옇게 뿜어대던 휴식의 시간에 잠시 삶이 고달프다 생각했던 것도 어쩌면 목구멍 깊숙이 박힌 어머니라는 단어 때문인지도 몰랐다. 나도 이제 그들의 나이로 달려가고, 그들처럼 검은 밤하늘을 바라보며 길게 담배 연기를 뿜는다. 알 수 없는 밤하늘이 펼쳐져 있을 때 허연 달을 보면서 어머니가 누운 방향으로 고개 돌리는 날이 많아졌으므로. _65쪽


  이유 없이 좋았다. 그렇게 이유 없이 좋아하다 보면 끝내 이유가 생기는 것이다. 왜 사랑하냐고 묻지 마시라. 그냥 사랑하고 그냥 좋아하는 그 마음이 가장 순수한 것을. 그것을 의심하지 마시라. _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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