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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이야기/독서 노트

상처적 체질 - 류근

by 양손잡이™ 2014. 1. 4.
상처적 체질 - 8점
류근 지음/문학과지성사



002.


벌레처럼 울다


벌레들은 죽어서도 썩지 않는다

우는 것으로 생애를 다 살아버리는 벌레들은

몸 안의 모든 강들을 데려다 운다

그 강물 다 마르고 나면 비로소

썩어도 썩을 것 없는 바람과 몸을 바꾼다


나는 썩지 않기 위해 슬퍼하는 것이 아니다

살아서 남김없이 썩기 위해 슬퍼하는 것이다


풍금을 만나면 노래처럼 울고

꽃나무를 만나면 봄날처럼 울고

사랑을 만나면 젊은 오르페우스처럼

죽음까지 흘러가 우는 것이다

울어서 생애의 모든 강물 비우는 것이다


벌레처럼 울자 벌레처럼

울어서 마침내 화석이 되는 슬픔으로

물에 잠긴 한세상을 다 건너자


더듬이 하나로등불을 달고

어두워지는 강가에 선 내 등뼈에 흰 날개 돋는다




폭설


그대 떠난 길 지워지라고

눈이 내린다

그대 돌아올 길 아주 지워져버리라고

온밤 내 욕설처럼 눈이 내린다


온 길도 간 길도 없이

깊은 눈발 속으로 지워진 사람

떠돌다 온 발자국마다 하얗게 피가 맺혀서

이제는 기억조차 먼 빛으로 발이 묶인다

내게로 오는 모든 길이 문을 닫는다


귀를 막으면 종소리 같은

결별의 예감 한 잎

살아서 바라보지 못할 푸른 눈시울

살아서 지은 무덤 위에

내 이름 위에

아니 아니, 아프게 눈이 내린다

참았던 뉘우침처럼 눈이 내린다


그대 떠난 길 지워지라고

눈이 내린다

그대 돌아올 길 아주 지워져버리라고

사나흘 눈 감고 젖은 눈이 내린다




독백


차마 어쩌지 못하고 눈발을 쏟아내는 저녁 하늘처럼

내게도 사랑은 그렇게 찾아오는 것이다

밀린 월급을 품고 귀가하는 가장처럼

가난한 옆구리에 낀 군고구마 봉지처럼

조금은 가볍고 따스해진 걸음으로 찾아오는 것이다

오래 기다린 사람일수록 이 지상에서

그를 알아보는 일이 어렵지 않기를 기도하며

내가 잠든 새 그가 다녀가는 일이 없기를 기도하며

등불 아래 착한 편지 한 장 놓아두는 것이다

그러면 사랑은 내 기도에 날개를 씻고

큰 강과 저문 숲 건너 고요히 내 어깨에 내리는 것이다

모든 지나간 사랑은 내 생애에

진실로 나를 찾아온 사랑 아니었다고 말해주는 것이다

새처럼 반짝이며 물고기처럼 명랑한 음성으로

오로지 내 오랜 슬픔을 위해서만 속삭여주는 것이다

나는 비로소 깨끗한 울음 한 잎으로 피어나

그의 무릎에 고단했던 그리움과 상처들을 내려놓고

임종처럼 가벼워진 안식과 몸을 바꾸는 것이다

차마 어쩌지 못하고 눈발을 쏟아내는 저녁 하늘처럼

젖은 눈썹 하나로 가릴 수 없는 작별처럼


내게도 사랑은 그렇게 찾아오는 것이다 새벽별

숫 눈길 위에 새겨진 종소리처럼




極地 (극지)


살아오는 동안 나는

내가 사랑하는 것들로부터 거의 언제나

일방적으로 버림받는 존재였다

내가 미처 준비하기 전에

결별의 1초 후를 예비하기 전에

다를 떠나버렸다


사람을 만나면 술을 마셨다

술자리가 끝나기 전까지는 떠나지 않으리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가야 할 사람들은 늘 먼저 일어서버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끝까지 잘 참아주었다


그러나 마침내 술자리가 끝났을 때

결국 취한 나를 데리고 어느 바닥에든 데려가

잠재우고 있는 것은 나였다


더 갈 데 없는 혼자였다




치타


전속력으로 달려가 톰슨가젤의 목덜미를 물고

숨을 헐떡거리고 있는 치타를 보면


먹이를 물고 나무에 오를 힘마저 탕진한 채

하이에나 무리에게 쫓겨 주춤주춤

먹이를 놓고 뒷걸음질 치는 치타를 보면


주린 배를 허리에 붙인 채 다시 평원을 바라보는

저 무르고 퀭한 눈 바라보면


쉰 살 넘어 문자 메시지로

전속력으로 해고 통보받은 가장을 보면

닳아 없어진 구두 뒷굽을 보면


거울을 보면




  눈으로 읽을 땐 몰랐다. 입으로 낭독할 때도 몰랐다. 시를 보는 눈이 낮기 때문에, 솔직히 그럴 듯한 시를 체크해두고, 나는 시집도 읽소, 라고 큰소리 좀 내보려고 몇 편 옮겨적었다. 옮기고서야 아, 류근은, 나는, 우리는 모두 이렇게 혼자인 사람이구나. 세상에 혼자 존재한다는 걸 죽어도 싫어해 타인과 관계를 맺음으로써 세상을 살아가려 했던 건데, 그저 같이, 함께, 큰 사랑이 아닌 작은 눈길 하나를 바랐던 건데, 결국은 진창 속에서 허우적대는 나를 발견할 때 그 허탈함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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