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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이야기/독서 노트

파리대왕 - 윌리엄 골딩

by 양손잡이™ 2014. 2. 26.
파리대왕 - 8점
윌리엄 골딩 지음, 유종호 옮김/민음사



021.


  초등학교 때 언뜻 읽었던 기억으로는, 돼지라는 별명을 가진 인물이 절벽에서 낙사하는 장면밖에 남지 않는 책이었다. 그리 긴 묘사는 아니었지만 하얀 포말과 대조되는 부글거리는 피와 부들거리는 몸뚱아리가 매우 선정적이고 위험하게 다가왔다. 그외의 내용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작년 말에 민음사 리퍼브 도서 판매전에서 10년도 더 된 추억을 가지고 집어들었다. 이것도 미루고 미루다가 회사 동호회에서 같이 읽어보자는 말이 나와 겨우 폈다.


  스토리는 매우 간단한다. 비행기를 타고 피난길(으음? 이것에 대해서 정확한 설명을 하지 않는다)에 올랐던 소년들은 요격을 받아 무인도에 불시착하게 된다. 어른은 하나도 남지 않았고 다섯 살부터 열두 살까지의 소년들만이 살아남았다. 처음에는 랠프가 두목이 되어 이곳에서 구출될 궁리를 한다. 봉화를 피우고 살기 위해서 오두막을 짓는다. 하지만 곧 사냥을 주장하는 잭과 반목하게 된다. 두 패거리의 갈등은 더욱 심해지고 결국 소년 몇이 죽는다. 그러다 섬의 연기를 발견한 영국 해군이 소년들을 구출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난다.


  무인도에 갇힌 소년들이 갈등하는 이야기! 이렇게 보면 참 간단한 이야기다. 책도 그리 두껍지 않을뿐더러(민음사판 기준 303쪽) 대화와 액션도 많기에 쉬이 읽히는 부분이 많다. 중간중간 고루한 묘사가 있는 몇 부분을 제외한다면 읽기 자체는 그리 힘든 책은 아니다. <파리대왕>의 진짜 가치는 이야기 속 인물과 상징에 있다.


  처음부터 극명하게 나타나듯이 랠프는 인간의 문명을, 잭은 야만성을 상징한다. 구조를 위해 모닥불을 피우고 비를 피하기 위해 오두막을 세우는 랠프와 달리 잭은 생존만을 외치며 멧돼지를 사냥하고 불은 그저 요리용으로밖에 사용하지 않는다. 생존에 잘 맞지 않는 듯하지만 모두 사리에 맞는 말을 하는 돼지, 그들이 두려워하던 짐승이 사실 별볼일 없는 시체라는 것을 안 사이먼.


  인물 외에 사물에도 큰 상징성이 있는데 바로 소라와 돼지의 안경이다. 회의를 소집하고 발언권을 얻는 데 필요한 소라는 최소한의 민주·도덕적인 절차를, 돼지의 눈을 밝혀줌과 동시에 불을 피울 수 있게 한 안경은 과학을 뜻한다. 회의라는 양식이 사라진 후 소라가 언급되는 빈도가 현저히 줄어들고 안경이 한쪽씩 깨질수록 야만을 상징하는 잭 패거리의 위세가 등등해진다.


  사이먼과 짐승에게 바치는 멧돼지 머리가 대화(?)하는 부분도 압권이다. 아무 것도 아닌 시체에게 아이들은 짐승이라는 이미지를 덧씌웠고 제물 격으로 바친 멧돼지 머리가 바로 책 제목인 '파리대왕'이다.(헤브루어로 베엘제버브를 번역한 것이라는데, 직역하면 곤충의 왕, 즉 파리대왕이 되는 것이란다. 오역이란 말도 있지만 넘어가자) 아이들이 무서워하고 절대악이라고 생각하는 짐승과 그에게 주어진 제물은 짐승과 잭 패거리를 상하관계로 구조시킨다. 파리대왕의 아가리의 심연에 사이먼이 동화되고 '자신이 너희들의 일부분'이라고 말하는 장면은 인간 심연에 깔린 어두움을 극명하게 표현한다.


  하지만 문명이라고 무조건 받들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구조도 중요하지만 당장의 생존도 중요하다. 멧돼지 사냥에 능한 잭과 달리 랠프는 자기 앞으로 달려오는 멧돼지에 지레 겁을 먹는다. 결국 그는 중요한 식량을 얻지 못한다. 문명과 야만의 극명한 이분법적 구분은 이야기를 극적으로 이끌지만 이 책을 불편하게 만든다. 스콧 스미스의 <폐허>에서는 불을 피우기 위해 헤밍웨이의 소설을 불태우는 장면이 있는데 <파리대왕>의 상황과 병치되는 재밌는 경험을 하기도 했다. 이런 뚜렷한 구분이 책의 가장 큰 비판점이지만 오히려 왜 상대를 받아들일 수 없는가에 대한 의문이 떠오르는 부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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