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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이야기/독서 노트

불온한 산책자 - 애스트라 테일러

by 양손잡이™ 2014. 8. 30.

불온한 산책자 
애스트라 테일러 엮음, 한상석 옮김/이후



072.


  이번에 내게 소개된 세 권의 책은 문학, 철학, 자연과학이었다.(책을 일일히 적지 않겠다) 평소라면 응당 문학책을 골랐을터이나 올해 독서기록을 보니 철학책이 하나도 없다. 작년에는 그나마 개론서라도 읽었는데 말이다. <히틀러의 철학자들>을 읽고서 다시 철학에 관심을 가진 김에 철학 관련 서적인 <불온한 산책자>를 골랐다.


  책은 다큐멘터리 ‘성찰하는 삶’의 바탕이라고 할 수 있다. 8명의 현대철학자들을 연구실에서 끄집어냈다. 거리와 공원, 차 안, 심지어 쓰레기장에서 그들과 대화를 나눈다. 뭔가 고차원적이고 어려워보이는 철학을 현실과 접목시키려는 의도이다.


  소개된 철학자들을 살펴보자. 코넬 웨스트, 아비탈 로넬, 피터 싱어, 마이클 하트, 마사 누스바움, 콰메 앤서니 애피아, 슬라오볘 지젝, 주디스 버틀러. 오 마이 갓. 이름을 아는 건 단 두 명인데다가 둘 다 책을 자세히 읽어보기는 커녕 어떤 사상을 내세우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1장인 ‘진리’를 펴고서 후회했다. 아, 이 책, 잘못 골랐구나.


  확실히 어려운 편이다. 보통의 철학 개론서나 철학사책은 철학적 사고를 차근차근 보여준다. 기본과 시초가 되는 사유와 철학자를 소개하고 단계적으로 쌓거나 반론을 제기하면서 전개된다. 하지만 <불온한 산책자>는 가벼운 마음과 ‘뇌’로 읽어서는 이해가 쉽지 않을 것이다.


  책은 철학자들이 쉽게 설명하기보다는 인터뷰어의 질문에 답하는 방식이다. 첫 독서에서 이 책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는 물론이고 니체, 로크, 데리다(겨우 1년 전에 처음 들어본 데리다라니!)까지 기저에 알아야 한다. 진입장벽이 너무나도 높아서 진땀 흘렸다. 게다가 1장(코넬 웨스트, 진리)과 2장(아비탈 로넬, 의미)이 다른 장보다 상대적으로 어려운 편이다.


  앞의 두 장은 ‘철학은 거리에서 이루어진다’라는 책의 카피를 (적어도 내게는) 잘 반영하지 못하지만 다행히도 3장(피터 싱어, 윤리)부터는 읽는 재미가 생긴다. 3장은 아주 재밌는 질문으로부터 시작한다.


  (전략) 당신이 얕은 연못 옆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연못을 다 지나갈 때쯤, 어린 아이 한 명이 연못에 빠져 죽을 위험해 처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립니다. (중략) 당신이 연못에 들어가 꺼내 주지 않으면 아이는 물에 빠져 죽을 수 있는 상황이지요. 물에 들어간다고 당신이 위험에 빠지지는 않습니다. 연못이 얕다는 걸 알기 때문입니. 그러나 당신은 좋은 구두를 신고 있죠. 아무리 연못이 얕아도 연못에 들어가면 구두는 십중팔구 망가질 겁니다.

어떤 선택을 할 거냐고 물어보면 누구나 당연히 구두 따위는 잊고 아이를 구할 것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면 나는 이렇게 말하죠. “좋습니다. 나도 당신 말에 동의합니다. 그런데 당신이 지금 신고 있는 구두 값 정도만 <옥스팜>이나?<유니세프> 같은 곳에 기부한다면, 가난한 나라의 아이를 한 명 이상 구할 수 있을 겁니다.” (121쪽)


  어찌 보면 궤변이라 할 수 있겠지만, 원래 무언가 의미를 담은 말들은 대부분 이런 식이다. 어쨌든, 이 부분을 읽고 나는 적금 10만원을 줄이고 그 돈을 유니세프에 기부하기로 마음먹었다. ‘나’를 바꾸는 자기계발서적이나 경영서보다 이런 책이 떄론 도움이 될 때도 있단 말이지.


  이외에도 몇 구문을 집어두었지만 모두 파편적인 의미만을 가지기 때문에 메모만 해두었다. 파편적이라는 것 어려움과 동시에 책의 단점이기도 하다. 한 권으로도 모자를 사유의 향연을 짧은 부분에 담으려니 전체적으로 욕심이 과한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인터뷰이들은 독자(또는 시청자)를 배려하지 않는다. 뭐, 어쩌면 당연한 거겠지만.


  겨우 마지막 장을 덮은 나와 달리 책을 같이 읽으신 분은 재독을 하셨다.(난도가 있는 1, 2장은 빼고!) 이분도 처음엔 나와 같은 느낌을 받으셨단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도 모르겠고 책을 덮고 싶고. 재독하니 그나마 인터뷰어가 의도한 바가 무엇인지 어렴풋이, 정말 어렴풋이 알겠다고 하셨다.


  그렇다. 이 책은 난이도도 높은 주제에 두세 번은 읽어야 큰 의미로 다가오는 책이었다. 깊게 읽기보다는 넓게 읽기 습관을 가진 나로서는(사실 그리 넓지도 않다) 힘들 수밖에 없던 책이었다. 철학이 사라진 시대를 성찰한다는 멋진 카피가 마음에 콱 와닿는, 철학을 좀 공부하셨던 분에게는 추천드릴 만한 책이다.



성찰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 (22쪽)


지적 쾌락은 늘 특정한 사회질서, 즉 지배구조를 통해 형성된 사회질서를 전제로 하고 그 질서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34쪽)


일종의 이차적인 보완 장치인 글은 모든 것을 적어 놓기 때문에 모든 기억을 지워 없앱니다. 글은 망각을 조장합니다. (68쪽)


위대한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에 따르면 이론가의 의무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국가를 상대로 한 사적인 작은 전쟁터에 서는 겁니다. 사람들은 공포탄만 쏘아대고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당신의 의무는 큰 목소리를 내는 것, 당신의 생각을 말하는 것, 추문을 의식하고 실망을 표현하는 것, 그리고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확신하더라도 성실하게 그런 일을 해 나가는 겁니다. (80, 81쪽)


토머스 아퀴나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한에서 재산을 향유할 자연권이 있다. 그러나 필요를 모두 만족시켰다면, 필요 이상으로 지나치게 많이 가지고 있다면, 반면에 다른 살마은 자기 필요를 충족시킬 만큼 갖고 있지 못하다면, 그떄 재산에 대한 우리의 권리는 [필요를 충족시키지 못한] 그 사람의 권리를 능가하지 못한다. (130쪽)


적절한 말투로 말하면 어떤 헛소리라도 심오한 생각처럼 들ㄹ비니다. 내가 지혜라는 것에 철저하게 반대하는 이유죠. (2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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