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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이야기

네가 있든 없든, 살고 있다

양손잡이™ 2011.05.13 04:00
  비가 온다. 오랜만에 방을 나선다. 한참 걸어 버스 정류장을 찾는다. 이제는, 그리고 예전에도 버스는 다니지 않던, 이름만 버스 정류장인, 그리고 우리의 추억과 만나고, 웃고, 떠들고, 헤어졌던 곳.
  버스는 오지 않는다. 아무도 없다. 처음 우리가 만났을 때도 이렇게 비가 오던 날이었다. 비를 피하려고 들어간 곳이 하필 버스도 다니지 않는 빈 정거장일 게 뭐람. 평소 다니지도 않던 길이었는데 그땐 무슨 바람이 불어서인지 그곳을 걸었다. 신문지 한 장으로 하늘을 가리며 정류장 안으로 들어오던 너. 잠시 비가 그칠 때까지, 심심하지 않을까 말을 붙여봤다. 조용히 맞장구를 치고 입을 가리며 살짝살짝 웃던 너. 얘기를 들어보니 너도 평소에 다니지 않던 길이었다. 그 얘기를 듣는 순간 알았다. 이건 분명 하늘이 나에게 주신 운명이라고.
  뭐, 그 뒤부터는 다른 커플들과 마찬가지의 이야기이다. 영화보기, 산책하기, 독서하기, 운동하기, 수다떨기 , 풍족하지 않았지만 나름대로의 재미와 멋을 한껏 가진, 소소한 만남이었다. 그러면서 하루의 마지막은 꼭 버스정류장이었다. 버스를 타고 각자의 집으로 헤어지는 곳이 정류장이 아니라, 이제는 아무도 필요로 하지 않는, 빈 정류장. 그곳에서 우리는 처음 만났고, 처음 손을 잡았고, 처음 입을 맞췄다.
  만남의 이야기가 다른 커플들과 마찬가지여서일까, 감정의 퇴색 또한 그들과 다를바 없었나보다. 나를 바라볼 때 그렇게도 반짝였던 너의 눈인데, 이제는 그 안에서 단단한 돌이 보인다. 내가 뱉은 가시, 네 옆구리에 박힌 지 며칠이 지났는데도 떨어질 줄 모른다. 화를 내고, 또 화를 내고, 나는 불안했다. 너는 모든 걸 주었지만 나는 너무나 많은 걸 원했나보다. 그렇게, 계속 달린다. 발과 가슴에는 커다란 멍이 든다. 불안이 내 마음을 가득 채워, 내 마음에서 네가 얻을 건 아무 것도 없었고 어느새 너 또한 잃을 게 하나도 남지 않았다. 결국 미안하다, 고 말한다. 누가? 누가랄 것도 없이, 누가. 누군가가.
  오랜만이지. 젖은 의자에 앉아 한숨을 쉰다. 항상 너의 손이 있던 내 옆자리로 손을 뻗어보지만 만져지는 건 축축한 나무뿐이다. 주먹을 쥐어 추억을 아스라이 잡는다. 사실 이곳에서 만난 게 너인지, 다른 너인지, 또 다른 너인지는 모르겠다. 비가 오던 날 만난 너인지, 영화관에서 만난 너인지, 커피숍에서 만난 너인지, 도무지 모르겠다. 너 없이는 살 수 없을 거라고, 그렇게 울어댔는데 글쎄, 네가 있든 없든 살고 있다. 꾸역꾸역, 말이다. 기억하는 네가 누구든 고맙다. 네 덕에 이렇게 꾸역꾸역, 살고 있다.
  버스는 오지 않는다. 아무도 없다. 흙길의 풀은 물을 잔뜩 머금는다.


- With or Without You, U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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