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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이야기/독서 노트

화재 감시원 - 코니 윌리스 (아작, 2015)

by 양손잡이™ 2017. 9. 25.

밀린 독후감이 많아서 기록의 의미로 짧게 쓰고 간다.


예전에 ‘리알토에서’를 읽다가 대체 이게 무슨 이야기인가 이해할 수 없어서 그대로 덮었던 책이다. 온통 뒤죽박죽이었다. 인물들이 하는 말과 행동이 하나도 일치하지 않았고 엉망이었다. 아작 출판사가 막 책을 낼 때, 마음에 쏙 들어서 책을 폈지만 그 난잡함에 집중하기 힘들었다.


이번에는 마음 다잡고 읽어보고자 꾹 참고 페이지를 넘겼다. 전에 재미없게 읽었던 ‘리알토에서’도 중반을 넘어가니 속도가 붙었다. 흠, 괜찮네, 하면서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니 그뒤부터는 일사천리. 아주 만족스런 소설집이다.


코니 윌리스는 미국 작가로 역대 최다 휴고상을 수상한(11번) 아주 화려한 이력을 가졌다. 네뷸러상, 로커스상도 여러번 받았다. 데몬 나이트 기념 그랜드 마스터 상을 받은 그랜드 마스터이기도 하다.


작가의 대표 장르가 SF라고 하는데 코니 윌리스 작품집 중 첫번째에 해당하는 이 책은 흔히 우리가 떠올리는 SF는 아니다. 흔히 SF 하면 떠올리는 로봇, 시간여행, 우주활극, 우주비행선은 이야기에서 언급되지 않는다. 오히려 미스터리, 스릴러를 떠올리게 하는 이야기들이다. 심지어 ’내부 소행’은 강령술 이야기다.


단편이기 때문에 전체를 통과하는 메세지나 요약은 힘들고, 각 이야기마다 느낀 감상을 한두 줄로 써보면,



리알토에서 - 미시세계에서 설명되는 양자역학이 거시세계인 우리의 현실에 나타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다소 난잡하고 시끄럽지만 양자역학의 불가해성을 잘 표현해낸 이야기다.


나일강의 죽음 - 애거서 크리스티의 동명의 작품을 오마쥬한 작품이라고 한다. 원작을 읽어보지 못해 오마쥬 어쩌구는 패스. 한 인물의 죽음에 대한 완벽한 미스터리이자 스릴러다. 주인공은 정말 죽은 것일까? 언제부터 망자의 이야기인가? 그녀는(혹은 그들은) 왜 죽었을까? 저승으로 가는 주인공은 과연 어떻게 될까? 궁금증을 마구 일으킨다.


클리어리 가족이 보낸 편지 - 세기말의 절망적인 상황. 어딘가에 이유모를 폭탄이 떨어지고, 가족이라는 한 공동체가 서로를 향해 총질을 할수밖에 없는 서글픈 상황을 그린다. 인간성을 상실한 미래, 인물들은 희망을 가질 수 있을까?


화재 감시원 - 코니 윌리스에게 휴고상과 네뷸러상을 동시에 안겨준 작품. 책의 표제작인 동시에 코니 윌리스의 대표 중편이라고 한다. 역사를 어떤 식으로 봐야 하냐는 질문에 답하는 코니 윌리스의 멋지고 감동적인 이야기다. 단순히 몇 줄의 글에 표현된 역사 사건을 넓게 넓게 펼치면 순간은 정말 찬란하고 아름다우며, 비극적이고 희극적인 온갖 감정의 집합체다. 우리가 역사를 볼 때, 단순히 문자를 해석하는 게 아니라 당시를 상상하고 공감하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는, 코니 윌리스의 강력한 설득.


내부 소행 - 특이하게도 강령술에 대한 이야기다. 흠, 작가가 이 소설을 어떤 의도로 썼는지는 잘 모르겠으나(두 명의 회의주의자를 보여줌으로써 합리적 의심과 이성적인 판단의 중요성을 말하고 싶었을지도) 적어도 나는 회의주의자가 사랑에 빠지는 아름다운 러브스토리로 읽었다. 회의주의자의 두 번째 규칙, ‘너무 훌륭해서 진짜라고 믿기 힘들 정도라면, 진짜가 아닐 가능성이 크다.’를 계속 되뇌게 만드는 작품.



이렇게 재밌게 읽을 줄 알았다면 조금 더 일찍 봤어야 했는데. SF라는 이름에 피하지 말고 놀라운 이야기,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본다는 생각으로 책을 봤으면 한다. 읽는 재미에 생각하는 재미까지 여러모로 좋은 작품집이다. 미국에서 열 편의 중단편을 모아 책을 냈는데 <화재 감시원>은 이중 다섯 편을 추렸고 나머지는 <여왕마저도>로 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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