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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이야기/독서 노트

절망은 당신 곁에 - 절망의 구 (김이환)

by 양손잡이™ 2011. 9. 15.
절망의 구 - 8점
김이환 지음/예담


  오늘은 김이환 작가의 '절망의 구'입니다. 표지가 상당히 재밌군요. 중간에 원더걸스 소희가 어머나 하는 것 마냥 한 남자가 그려져있네요. 아니 뭉크의 절규인가? 캐릭터를 정말 잘 그릴 게, 책을 읽다 다시 표지를 보면 아, 주인공과 주변인물들이 이렇게 생겼구나, 하고 저도 모르게 동감하고 만다 이겁니다. 비약이 심하다구요? 알아요. 저는 허세킹이니까요.
 
  이야기는 갑작스레 시작합니다. 주인공은 담배를 사러 잠깐 집을 나섰는데 자기 앞에 2m짜리 검은색 구가 떡하니 버티고 있죠. 호기심 많은 동네 아저씨가 그 구를 만지자 그는 구 안으로 빨려들어갑니다. 주인공은 겁이 나서 무조건 뛰기 시작하고, 검은색 구는 제일 가까운 사람을 향해 계속 나아갑니다. 그리고 흡수 흡수 흡수. 그리고 부모님이 걱정돼서 부모님이 사시는 동네로 출발합니다. 그리고 다음날부터 본격적인 재앙이 시작되지요. 구는 계속 사람을 흡수하고, 땅 뿐 아니라 하늘을 날기도 하고, 게다가 시발 분열도 합니다. 2의 제곱 아시죠? 이게 시간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수는 곱절로 늘어나게 됩니다. 가뜩이나 하나로도 무서운데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니...
 
  주인공은 무작정 부모님 집을 찾아 나서게 됩니다. 그동안 겪는 일들은 다른 재난소설과 별 다를 게 없죠 뭐. 역시 사람이 문젭니다. 정치인들은 일찍이 해외로 튀었고 무법자들은 그 와중에도 다른 사람들을 수탈합니다. 사람들은 무한이기주의를 띄게 되고, 솔직히 주변을 보면 그 누구도 믿을 수 없게 되버립니다. 공을 피해 달아나기도 힘든데 인간들이 얼마나 걸리적거리는지 아주 답답해 죽겠습니다. 세계가 멸망할 판국에 뭔 돈이 필요하답니까?
 
  주인공은 죽어라 도망다닙니다. 책에 프린트되어 있듯이 끝없는 도주에 관한 기록이에요. 절망의 구에서부터 시작해 사람, 사회, 군중으로부터 몸을 피합니다. 아, 물론 주인공이 무조건 옳은 건 아닙니다. 그냥, 자기 몸뚱이 하나 살고자 피하죠. 근데 참 무섭지 않습니까? 어디선가 내게 절망의 구가 다가오는 겁니다. 멀리 떨어져 있다해도 구는 쉬지도 않고 아주 천천히라도 다가옵니다. 나는 졸려 죽겠는데 말입니다. 공과 나의 거리를 재서 몇분마다 계속 알람을 맞추고 10분 채 못 되게 잤다 깼다 잤다 깼다... 지옥도 이런 생지옥이 없죠.
 
  공에 흡수됐던 사람들은 그 순간 큰 절망의 느낌을 받습니다. 그래요, 절망. 우리의 뒤에서 아주 천천히, 쉬지도 않고 다가오는 절망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절망에 쫓기며 살아가고 있죠. 구의 표면에 대한 묘사를 잠깐 추려볼까요


  남자는 구에서 머리를 떼었다. 그제야 만져본 구의 표면은 검은 금속같이 생긴 외양처럼 촉감도 금속과 유사했다. 단단하고 서늘하며 미끄러웠다. 하지만 한편으로 금속이 아닌, 그리고 어떤 물질도 아닌, 정체불명의 강력한 힘을 만지는 느낌도 들었다. 그러니까 표면은 구가 가진 힘의 장벽 같았다. 그것은 남자가 경험해 본 적 없는 영역의 느낌이었다. (225쪽)

 

  이 책에서 제일 백미라 느끼는 부분인데요, 절망이라는 추상적인 느낌을 그나마 구체적으로 묘사합니다. 절망을 '단단'하고 '서늘'하며 '미끄러웠'다고 하질 않나, '경험해 본 적 없는 영역의 느낌'이라고 하질 않나... 대단한 표현이라고 생각해요. 이런 상상력을 가져야 나도 문장을 좀 잘 쓸텐데... 제길.
 
  책은 아주 쉽게 읽힙니다. 어떤 요소가 이렇게 작용했을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냥 재밌어요. 주인공은 빠르게 도망쳐다니지만 느리게라도 계속해서 다가오는 불안한 존재 구, 온갖 인간만상, 진짜 손에서 놓지 않을 정도의 재미를 주었네요. 요즘따라 하루만에 읽는 책이 많이 늘어서 기분 좋군요. 물론 책읽기 외에 아무것도 하지 않지만... 쿨럭.
 
  책을 덮고 나서 제일 기억에 남는 부분은 여자아이가 주인공에게 '겁쟁이'라고 하는 부분입니다. 책을 다 읽고 나니 그 학교 부분이 이해가 가더군요. 겁쟁이... 천사...
 
  바깥에서 아이들 여럿이 소리를 지르며 놀고 있습니다. 그런데 책을 읽는 도중이어서 그랬을까요, 아니면 뭔가 제 마음 안에 캥기는 게 있어서였을까요. 저희 아파트 앞에 검은색 공이 굴러다니는 모습이 떠오르는 건 왜인지요.
 
(2010년 8월 26일, 4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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