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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

2011년 5월 17일 화요일 잡담 - 의심의 단상

by 양손잡이™ 2011. 5. 18.
  주머니에 손을 넣고 흠칫했다. 강당에 핸드폰과 지갑을 놓고 온 것이다. 카드에는 각종 카드가, 핸드폰에는 금융관련 증명서들이 모두 있다. 이걸 잊어버리면 당장 내일 주식시장을 실시간으로 보기가 어렵다. 장세가 외인의 매도 때문에 휘청거리는 요즘 타이밍이 중요하다. 제길. 얼른 도서관 옆자리에 있는 형에게 전화를 빌려 내 전화기로 전화를 걸었다. 컬러링의 첫 소절이 끝나자마자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핸드폰이랑 지갑 잃어버리셨죠. 예에. 네, 제가 아까 강당 가까이 있는데 혹시 어디세요? 예, 지금 강당 입구 앞에 있습니다. 네, 그럼 거기서 뵐게요, 곧 갈게요. 네, 감사합니다.
  시원시원한 목소리의 남자였다. 만나기로 한 강당 입구에 서있으니 조금 있다가 통통한 남자가 걸어온다. 손에는 지갑과 핸드폰을 조심스럽게 들고 있다. 생글생글 웃으면서 말을 걸어온다.
  놓고 가셨더라고요. 아이고, 감사합니다.
  남자에게 허리 숙여 인사했다. 중요한 물건을 돌려받았는데 아무 보상 없이 보내기에는 미안했다. 지갑을 열어보니 만 원짜리 지폐들밖에 없다. 한 장 꺼내 남자에게 건넨 후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다섯 발짝 정도 걸으니 남자가 다시 내게 걸어왔다. 그러곤 만 원을 다시 돌려주려 했다.
  아니, 너무 크네요. 아녜요, 핸드폰이 정말 중요한 물건이어서 그 정도는. 아닙니다, 겨우 그런 걸로. 정말 고마워서 그래요. 서로 돕고 돕는 거죠.
  남자는 얼른 내게 돈을 건네고 돌아섰다. 그리고 덩치에 맞지 않게 빠른 걸음으로 학생회관으로 들어갔다. 역시 아직 정의는 죽지 않았구나. 웃으며 핸드폰 홀드를 풀었다. 혹여나 핸드폰에 이상이 있을까 이리저리 만지다가 최근 실행되었던 어플 목록을 보았다. 목록에는 A은행 어플이 있었다. 주거래 은행이긴 하지만 제일 마지막에 실행했던 어플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혹시…?
  다시 도서관으로 돌아가 전화를 빌렸던 형에게 이게 무슨 일일까 물어보았다.
  글쎄, 은행 어플을 왜 켰을까? 혹시 내 핸드폰으로 뭘 하려고 했던 건 아니겠지? 그러고 보니 요즘엔 핸드폰에도 바이러스가 돌던데. 에, 그럼 설마 내 계좌에 손대려고 하는 건가? 어플 틀어볼까? 아냐, 괜히 틀었다가 잘못되면 어떻게 하려고. 핸드폰 꺼놓고 내일 은행 열자마자 가봐.
  얼른 핸드폰을 끄고 책상에 놓았다. 보면 볼수록 불안했다. 사람 좋게웃던 그 남자가 정말 핸드폰에 그런 짓을 했을까? 생각해보니 보통 보상금으로 만 원을 주면 좋다고 냉큼 받아간다. 그런데 남자는 주겠다는 걸 극구 사양하면서 돈을 돌려주었다. 혹여나 내 폰에서 자기의 계좌로 빠져나갈 돈에 비하면 얼마 안 되니까 돌려준 건 아닐까? 마지막 양심인지도, 동정심인지도 모른다. 결국 공부를 그만두고 집으로 향했다. 집에 연락도 못하고 버스 도착 어플도 없어서 너무 불편했다.
  다음 날 아침 학교 바로 앞에 있는 A은행으로 향했다. 직원에게 계좌를 조회해달라고 했다.
  예 고객님, 어제 인출내역이 있으시네요. 그래요?
  화들짝 놀라 나도 모르게 소리를 높였다. 역시나 그 남자가 문제였다. 어쩐지 통통한 몸으로 빨리 걷더만 양심은 조금 있었나보다. 얼굴 가득 있던 웃음이 정말 가식적으로, 또 야비하게 느껴지는지. 남자를 해가 지기 직전에 만나 얼굴을 기억한다는 것에 위안을 삼을 수 있었다. 그 얼굴을 머릿속에 더욱 확실히 그렸다.
 얼마가 빠졌나요? 예 고객님, 10만원입니다.
  10만원? 얼마 빼지는 않았나보다. 돈이 송금된 계좌번호를 물어보았다.
  네, 계좌번호는 XXX-XXX-XXXXXX이고 받으신 분은 K 님이십니다.
  K?
  이름을 듣고 한참 멍했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어제 형에게 10만원을 부쳤다. 송금 시간을 물어보니 오후 2시란다. 내친 김에 핸드폰 수리 센터에도 들러 점검을 받았다. 이상이 전혀 없단다.
참 얼굴이 화끈거렸다. 괜히 마음 착한 사람의 얼굴을 날강도로 만든 건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SSAT 대비 특강을 듣고 강당을 나서는데 의자 팔걸이에 있던 핸드폰과 지갑을 보았다. 주위에 아무도 없길래 나중에 찾아줄 요량으로 들고 나왔다. 지갑을 보니 후배다. 당장 연락할 번호가 없어서 바로 기숙사로 들어와 학교 커뮤니티에 물건 찾아가라는 글을 올리려고 했다. 잠시 핸드폰의 홀드를 풀고 잠깐 만져보았다. 그러다 은행 어플을 틀었다. 실행어플목록을 보면 괜히 오해할만한 사항이기도 했다. 곧 핸드폰으로 연락이 왔고 전화 주인과 만났다. 그 사람은 지폐 한 장을 건넸고 시간이 9시가 되어 이미 어두운 나머지 그게 만 원인 걸 알아채지 못했다. 4개의 0을 보니 이건 아니다, 라는 생각이 번뜩 들어 얼른 돌려주었다. 기숙사로 들어오면서 혹여나 내가 의심받지는 않을까하는 재미난 상상을 해봤다.
 


  
- 독서 기록

  캐치-22 상, 조지프 헬러

  점점 재밌어진다. 물론 아직도 진도가 한참 남았지만 말이다. 바쁜 요즘인데 과연 5월 안에 하권까지  읽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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