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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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서 나무가 쓰러졌는데 듣는 사람이 없었다면, 그건 소리가 난 걸까? - 철학의 13가지 질문 (잭 보언)문장 이야기 2013. 8. 18. 22:01
철학의 13가지 질문 - 잭 보웬 지음, 하정임 옮김, 박이문 감수/다른 그때 남자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저 소리가 들리니?"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데요?" "소리가 안 들린다고? 이 이어폰을 꽂고 카메라를 봐." 카메라를 들여다보니 나뭇잎이 한층 가까이 보였다. 나뭇잎은 흔들리고 있었다. 그래도 나뭇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는 안 들리는 것 같은데... "들리니?" 나는 다시 고개를 가로저었 다. 카메라에 개미가 걸어가는 모습이 잡혔다. 개미의 작은 발이 소리를 내고 있겠지만 내 귀가 들을 수 있는 소리는 아니었다. "그 소리는 어떠니?" 또 고개를 젓는 수밖에 없었따. 이번에는 또 뭘 보여 주려나? 짐작도 되지 않았따. 남자는 카메라의 줌 버튼을 눌러 피사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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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배달] 메리 올리버,『완벽한 날들』중에서문장 이야기 2013. 7. 29. 03:19
시인 맥신 쿠민은 말했다.“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눈보라 관찰자 였던 것처럼 올리버는 습지 관찰자 이며 자연 세계에 대한 포기할 줄 모르는 안내자 이다.” 메리 올리버,『완벽한 날들』중에서 다수가 우리의 주목을 끌듯 하나의 생물이나 순간도 그러하다. 개들을 데리고 물이 많이 빠진, 그리고 아직 빠지고 있는 해변을 걷고 있는데 얕은 물속에서 뒹구는 게 눈에 띈다. 나는 발목까지 차는 물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고립된 아귀다. 아, 너무나도 그로테스크한 몸, 지독히도 불쾌한 입. 몸 전체 크기만큼 거대한 어둠의 문! 아귀의 몸 대부분이 입이다. 그런데도 그 초록 눈의 색깔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에메랄드보다, 젖은 이끼보다, 제비꽃 잎사귀보다 더 순전한 초록이고 생기에 차서 반짝인다. 나는 어쩔 줄을 모른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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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배달] 박성준, 「수증기」문장 이야기 2013. 7. 12. 01:53
내일 오후, 애인이 떠나면서 선물한 벽지로 그는 도배를 할 것인가그들은 서로에게 던지는 평서문에 대해 고민을 하는가선량하다 이악스럽다 해맑게 억세다 삐뚤빼뚤 피가 흐른다? 무슨 말을 시작해야 좋을까다정한 주름 밖으로 성대를 잘라낸 개처럼 편안하게 웃는 것, 그들에겐 부족한 것은 없는가목이 마를 때면 송곳으로 방바닥에 애인은 그의 이름을 긁어주곤 하는지그들은 서로에게 무능해서 착한 사람들왜 이별은 가벼워지기 위해 뿌리가 길까 • 시·낭송_ 박성준 – 1986년 서울에서 태어났고, 2009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는'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시집으로 『몰아 쓴 일기』가 있다.• 출전_ 『몰아 쓴 일기』(문학과지성사)• 음악_ Digital Juice – BackTraxx• 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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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배달] 류시화, 「모란의 연(緣)」문장 이야기 2013. 7. 3. 00:33
어느 생에선가 내가몇 번이나당신 집 앞까지 갔다가 그냥 돌아선 것을이 모란이 안다겹겹의 꽃잎마다 머뭇거림이머물러 있다 당신은 본 적 없겠지만가끔 내 심장은 바닥에 떨어진모란의 붉은 잎이다돌 위에 흩어져서도 사흘은 더눈이 아픈 우리 둘만이 아는 봄은어디에 있는가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한 소란으로부터멀리 있는 어느 생에선가 내가당신으로 인해 스무 날하고도 몇 날불탄 적이 있다는 것을이 모란이 안다불면의 불로 봄과 작별했다는 것을 사이버문학광장 문장 문학집배원 장석남의 시배달 7월 2일http://munjang.or.kr/archives/173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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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배달] 니코스 카잔차키스, <영국 기행> 중에서문장 이야기 2013. 5. 26. 22:11
니코스 카잔차키스, 『영국 기행』을 배달하며 어쩌면 뻔한 이야기처럼 보입니다만 1939년이 시대적인 배경인 점을 감안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해 7월, 그러니까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직전에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영국을 방문하여 다음해 봄까지 머물렀습니다. 그는 산업혁명 이후 영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자본주의의 성장모습과 삶이 변화하는 과정들을 꼼꼼하게 기록하고 자신의 견해를 진지하고 설득력 있게 덧붙이고 있습니다. 이 대목은 산업화에 휘둘리는 사람들을 보면서 예전에 중국에서 만났던 어느 노승과의 대화를 떠올린 것이죠. 그가 영국에 머무는 동안 전쟁이 일어났고 그 자신도 지하대피소로 대피하기도 했다니 이 일화, 또는 우화가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나저나 그런 게 실재 있다면 우리가 이미 만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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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배달] 청춘의 문장들 - 김연수문장 이야기 2011. 12. 4. 21:49
아마도 같은 해 봄이었을 것이다. 누군가가 내게 전화를 걸어 소설가 김소진 선배가 암으로 죽었으니 문상가자고 말했다. '절대로 가면 안돼!'라는 문장이 온몸으로 육박해왔다. 왜 가면 안되는데? 도무지 말이 안 통하는 그 느낌에 반항하듯 나는 장례식장을 찾아 책 날개에 실린 사진을 확대해놓은 영정에 두 번 절한 뒤, 도망치듯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며칠간 앓았다. 소설이 뭔데? 청춘이 도대체 뭔데? 다 귀찮아졌다. 지긋지긋했다. 남은 평생 소설 따위는 쓰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사진관에 가서 증명사진을 찍은 뒤, 문방구에서 이력서 용지를 사와서 여기저기 취직원서를 냈다. 그리고 양복에 넥타이를 매고 일산에서 장충동까지 매일 왕복 세 시간의, 여행에 가까운 출퇴근을 했다. 버스에 서서 창 밖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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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배달]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 - 최인호문장 이야기 2011. 12. 3. 20:00
그러나 K는 몹시 기분이 언짢았다. 강아지가 적의를 보이며 K를 낯선 침입자 취급을 한 것처럼 낯익은 아내와 낯익은 딸, 낯익은 휴일 아침의 모든 풍경이 한 순간 갑자기 자기에게 반기를 들고 역모를 꾸미는 듯한 불길한 예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들은 평화와 태평으로 위장하고 있지만 일치단결해 K를 속이고 K의 허점을 노리고 있었다. 자명종은 낯이 익지만 어제까지의 자명종이 아니다. 아내 역시 낯이 익지만 어제까지의 아내가 아니다. 딸아이도 낯이 익지만 어제까지의 딸아이가 아니다. 강아지도 낯이 익지만 어제까지의 강아지가 아니다. 스킨도, 휴대폰도 어디론가 발이 달린 것처럼 제 스스로 사라져버렸다. 이 돌연변이의 기이한 현상은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기인된 것일까. ― 최인호,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 눈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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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배달] 猫氏生 - 황정은문장 이야기 2011. 11. 29. 01:33
이따금 꼭대기 방을 찾아가서 문고리를 바라보며 울었다. 아무리 불러도 열어주지 않는 것이 분하고 안타까워 어떻게된거야 어떻게된거야 하며 울었다. 영물이라 이상한 소리를 내며 운다고 사람들이 이 몸을 쫓았으나 이상하기로 말하자면 인간도 마찬가지잖아 인간도 충분히 이상하게 울잖아 훨씬 이상하게 울잖아. 밤이고 낮이고 인간이 우는 소리를 들었다. ― 황정은, 「猫氏生」 고양이뿐 아니라 많은 다른 동물들이 우리를 어찌 볼까 두렵습니다. 뉴스에 만연하는 여러 사건들, 누구에게 상처입고 구석에서 흐느끼는 사람들. 세상엔 많고 많은 사람들이 있고 많고 많은 고통이 있습니다. 이상하다고 느꼈던 타인의 모습이 결국 나의 모습과 전혀 다를 바가 없는데 나와는 다르다고 한없이 밀쳐내곤 합니다. 너 이상해, 그래서 싫어.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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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배달] 어느 책중독자의 고백 - 톰 라비문장 이야기 2011. 11. 25. 00:57
데이트는 어떤가. 우리 책중독자들은 누군가에게 구애하는 걸 완전히 단념해버릴 수 있다. 그건 물론, 그러려면 성가시게 몸을 이끌고 나가서 데이트 상대와 실제로 함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식사, 영화, 콘서트일, 미술관, 미니골프, 그리고 온갖 종류의 다른 활동을 해야 함을 의미한다. 이 모든 일들이 우리 책중독자들의 귀중한 시간을 빼앗고 어떤 일들은 돈이 들기도 한다. 우리 책중독자들이 생각하는 완벽한 데이트란 이런 것이다. 두 사람이 무릎을 비추는 전등이 딸린 소파 두 개를 약간 떨어뜨려놓은 채로 앉아서 각자 다른 책을 읽는 것. 하지만 보통 사람들은 우리 책중독자들의 이런 생각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책방에서 데이트를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면 책이 아니라 우리 책중독자들의 행동이 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