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13가지 질문 - 잭 보웬 지음, 하정임 옮김, 박이문 감수/다른 |
그때 남자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저 소리가 들리니?"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데요?"
"소리가 안 들린다고? 이 이어폰을 꽂고 카메라를 봐."
카메라를 들여다보니 나뭇잎이 한층 가까이 보였다. 나뭇잎은 흔들리고 있었다. 그래도 나뭇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는 안 들리는 것 같은데...
"들리니?"
나는 다시 고개를 가로저었 다.
카메라에 개미가 걸어가는 모습이 잡혔다. 개미의 작은 발이 소리를 내고 있겠지만 내 귀가 들을 수 있는 소리는 아니었다.
"그 소리는 어떠니?"
또 고개를 젓는 수밖에 없었따. 이번에는 또 뭘 보여 주려나? 짐작도 되지 않았따. 남자는 카메라의 줌 버튼을 눌러 피사체를 최대로 확대했다. 두 개의 분자가 충돌하는 게 보였다. 소리는 전혀 들을 수가 없었다. 이 정도면 충분했다.
"어떠니? 침묵은 가능할까?"
"물론 가능하죠. 가능하지 않다면 그 말이 왜 생겼겠어요? 여기도 정말 침묵 그 자체네요."
"그러면 소리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듣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것에도 동의하겠네. 맞니? 그런데 듣지 않아도 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듣는 사람이 필요할까?"
"네, 그게 맞는 것 같아요."
우리는 온실 밖으로 나와 방음문을 닫았다.
"숲에서 나무가 쓰러졌는데 듣는 사람이 없었다면, 그건 소리가 난 걸까?"
나는 조용히 서 있었다. 우리는 뒤를 돌아 보았다. 나무가 쓰러졌다. 하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분명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어요."
"숲에 잘 익은 레몬이 있는데 보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면 그 레몬은 노랄까? 숲에 아름답게 핀 장미가 있는데 장미의 향기를 맡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장미의 향기는 그대로 달콤할까?"
나는 레몬과 장미를 보기 위해 온실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잠시 후 눈길을 돌렸을 때 남자는 이미 떠나고 없었다.
_철학의 13가지 질문, 잭 보언, 198-199쪽
사람이 무엇인가를 인지하는 데 있어 그 한계는 어디일까. 또한 우리가 안다는 것의 범위는 어디까지일까. 무엇까지가 참이고 거짓인 것인가. 존재와 무존재를 가르는 기준은 무엇인가. 단순한 한 마디에서 수없이 넓은 가지를 뻗어나갈 수 있는 발산의 힘. 끝없는 의문은 우리가 가진 유일한 무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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