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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이야기/독서 노트

Reading is Sexy - 책인시공 (정수복)

by 양손잡이™ 2013. 5. 20.
책인시공 - 7점
정수복 지음/문학동네



043.


  내 이상형은 책을 좋아하는 여자다. 아무리 어리고 예뻐도 그건 결국 한순간이고, 나이나 외모도 시간이 지나면 시간과 함께 그 또한 지나간다. 마인드가 통해야 대화도 통하는데, 내 마인드는 책과 영화에 쏠려 있기 때문에 결국 책을 읽는 사람을 찾게 된다. 잠시 마음에 품었던 한 여인은 너무나 귀여웠지만 책을 지독히 싫어해서 곧 싫증이 나고 말았다. 여자만 섹시한 게 아니다. 책을 읽는 남자도 굉장히 매력적이다.(커밍아웃이 아니다) 남녀노소를 떠나 책을 읽는 행위는 아름답고 섹시하다.


  <책인시공>은 노신사가 서점의 좁은 문에 서서 책을 들여다보는 사진으로 시작한다. 백발의 신사. 눈도 잘 보이지 않을 텐데 안경까지 벗고서 책 읽기에 몰두한다. 나이가 들었어도 어디에 기대지 않고 꼿꼿이 선 모습이 서점 특유의 분위기와 어울려 뭔가 결연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사회학자이면서 예술로서의 사회학을 지향하는 정수복은 <책인시공>에 파리 곳곳의 책과 책을 읽는 사람들을 찍었다. 땡볕 아래지만 그늘에서 책을 읽는 사람, 공원 벤치에 앉아 책을 읽는 사람, 카페에서 책을 읽는 사람, 서점 매대의 책을 보며 즐거워하는 사람, 시끄러운 길거리에서도 책을 손에 든 사람, 길을 걷다가 문득 생각이 떠올라 가게 벽에 기대어 글을 적는 사람 등 온갖 곳의 사진이 있다.


  우리나라는 길거리와 공원에서 책 읽는 사람이 드물지만 책 읽기를 좋아하는 이들에겐 <책인시공>의 사진이 친숙할 것이다. 사진이 말하고자 하는 건 책을 읽는 장소가 아니라 사람이기 때문이다. 책에 빠져서 허리는 점점 굳어지고 읽기에 몰두한 나머지 자세가 점점 흐트러진다. 벽에 기대기도 하고 때론 자세가 불편해 부스럭거리기도 한다. 책을 읽는 내내 표정은 완전히 사라지고 누가 불러도 반응이 없을 때도 있다. 영혼이 책에 쏙 달라붙었기 때문이다. 사진은 문화의 도시 파리에 사는 사람도 책에 몰두할 땐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걸 보여준다.


  정수복은 책과 사람 사진 외에 책 읽기에 대한 잡담을 잔뜩 썼다. 잡담이라고 시답잖은 글은 아니다. 책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푼 후에 여러 사람들(자신이나 다른 사람, 특히 작가들)이 말한 책 읽기 좋은 시간과 장소에 대해 말한다. <책인시공>의 매력은 인용되는 여러 텍스트에 있다. 한국과 파리를 오가는 동안 자신만의 서재를 잃어버리고 다시 꾸리는 글에서 기형도의 시 '오래된 서적'(주1)을 말하는 순간, 서재의 모든 책이 자신을 꺼내 읽어 달라고 아우성하는 소리가 들린다. '르 몽드'지에 실린 '책 읽기에 즐거움' 리스트에 든 '책을 읽고 있는 애인의 왼쪽 다리에 오른쪽 다리를 포개고 침대 위에서 책 읽기'라는 문장을 보면 야릇하지만 평온한 기분이 든다.


책의 압권은 서장에 해당하는 '독자 권리 장전'이다.(주2) 프랑스 작가 다니엘 페낙의 <소설처럼>에서 쓴 '독자의 절대적 권리들'을 정수복이 재구성하고 보완하였다. 17개의 항목으로 이루어진 이 장전은 책을 읽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글이다. 우리는 어디에서든, 언제든 아무 책이나 읽고 그 즐거움을 탐닉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소리내서 읽을 권리도, 다른 일을 하면서 읽을 권리도 있다. 많은 사람이 읽는 책을, 아예 책을 읽지 않을 권리도 있다. 책 읽기에 사명감도 목적도 가질 필요가 전혀 없다. 책 읽기는 유의미하고 동시에 무의미하다. 독서 그 자체를 그저 즐기면 된다.



주1.

내가 살아온 것은 거의

기적적이었다

오랫동안 나는 곰팡이 피어

나는 어둡고 축축한 세계에서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질서


(…)


나를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은 모두

나를 떠나갔다. 나의 영혼은

검은 페이지가 대부분이다, 그러니 누가 나를

펼쳐볼 것인가


_기형도, 「오래된 서적」 중에서



주2.

1. 책을 읽을 권리

2. 책을 읽지 않을 권리

3. 어디에서라도 책을 읽을 권리

4. 언제라도 책을 읽을 수 있는 권리

5. 책을 중간중간 건너뛰며 읽을 권리

6. 끝까지 읽기 않을 권리

7. 다시 읽을 권리

8. 아무 책이나 읽을 권리

9. 많은 사람이 읽는 책을 읽지 않을 권리

10. 책에 대한 검열에 저항할 권리

11. 책의 즐거움에 탐닉할 권리

12. 책의 아무 곳이나 펼쳐 읽을 권리

13. 반짝 독서를 할 권리

14. 소리내서 읽을 권리

15. 다른 일을 하면서 책을 읽을 권리

16. 읽은 책에 대해 말하지 않을 권리

17. 책을 쓸 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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