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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이야기/독서 노트

고리오 영감 - 오노레 드 발자크

by 양손잡이™ 2014. 5. 30.
고리오 영감 - 10점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박영근 옮김/민음사



051.


  도무지 쉴틈이 없다. 문단과 이야기의 호흡이 길어 흐름을 한번 놓치면 찾기가 꽤나 힘들다. 프랑스 고전의 특성일까. 빅토르 위고만 해도 <레 미제라블>, <웃는 남자>에서 그 장기를 확실히 보여주었다. 덕분에 1장을 다 못 읽고 덮었던 기억이 있지. 위고에 비해 발자크가 나은 점은 장광설을 늘어놓지 않는다는 것이다. 위고는 이런 설명이 필요할까 할 정도로 말만 길다는 느낌인 반면 발자크는 개연성 있게 말이 많다. (참 다행이지) 한번 말을 시작하면 네댓 쪽은 소화해버리는 수다쟁이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이야기 흐름은 끊이지 않는다. 보통 문학에선 행갈이를 하고 문단을 나누면서 이야기 전개가 약간 바뀌는데 발자크는 카메라로 롱 테이크 씬을 찍듯이 계속 이어진다. 끊어 읽기 힘든 구조지만 한번 빠지면 헤어나올 수 없다. 장면, 인물 묘사로 가득찬 1장 '고급하숙집' 고비만 넘어가면 4장까지는 금세 읽는다. 인물도, 사건도 흥미진진하다.


  어찌 보면 얼마 전에 읽은 <오만과 편견>과 궤가 비슷하다. 두 작품 모두 결혼이 바탕인데, <오만과 편견>은 가문과 돈, 출세에 대해 다소 밝게 그렸다면 <고리오 영감>은 그 아래의 암투를 묘사한 느낌이다. 남편의 가문과 아내의 지참금만이 결혼의 목적이 되고 각자 내연관계를 가지는 건 너무 당연하게 그려진다. 어떻게 하면 저 사람 눈에 띌까, 괜찮고 성격 좋은 사람이 보이네, 이런 쑥덕거림이 있는 사교계가 아닌, 자신의 영향력을 알아보고 남에게 과시하기 위한 사교계가 있다.


  춤추고 술마시고 노래하는 이 사교계는 겉으로는 신나보이지만 그 아래에는 서로를 밀치고 시기하는 시선이 보인다.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은 보세앙 부인의 마지막 파티이다. 내연남에게 배신당하고 파티에 쓸쓸한 모습으로 나설 보세앙 부인을 보기 위해 파리 사교계의 모든 인물이 몰려든다. 그녀를 위로하고 싶다는 셈이겠지만 속으론 꼭지점에 있던 그녀가 저 아래로 적나라하게 굴러떨어지는 모습을 구경하고 비웃고 위안삼을 것이다. 하룻밤 사이에 관계는 역전되고 모두들 아래는 쳐다보지 않는다.


  이런 사교계의 영향력을 얻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 옷과 마차, 마부, 미용사, 하인까지, 잘나보이려면 돈이 많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 결혼할 상대의 가치는 그(그녀)가 가져올 지참금으로 정해진다. 돈에 눈이 멀어 도박과 무리한 투자가 성행하고 빚만 늘어간다. 보트랭은 으젠을 돈의 액수로 유혹한다. 열심히 공부해서 변호사가 되면 쉰 살이 되어서야 연수입 5만 프랑이 될까말까 하겠지만 사교계에 뛰어들어 여자의 지참금으로 한밑천 잡는 괜찮은 혼(婚)자리를 선택한다면 그정도는 서른 살이 되어서도 이룰 수 있다고 말한다. 명예심과 고결함을 버리면 돈은 성공과 사치를 불러오는 단단한 기반이 된다. 이미 레스토 부인 집에서 사치의 냄새를 맡은 으젠은 출세를 위해 결국 사교계로 뛰어든다.


  하지만 고리오 영감이 있었기에 으젠은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자신은 가난하게 살아도 되니 두 딸에게 무한정한 사랑을 배푸는 영감을 보고 으젠은 마음을 다잡는다. 애초에 출세를 위한 마음가짐은 보트랭이 말했던 검은 속이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고리오 영감의 딸들의 모습과도 대비된다. 사교계에 진출해 자신이 출세하길 원하는 으젠은 어머니와 자매들에게 돈을 부쳐달라는 간곡한 편지를 보낸다. 돌아온 답장을 보고서 펑펑 우는 으젠에게 출세란 그저 이기심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영감의 딸들은 다르다. 어릴 적부터 요구하는 것은 영감이 모두 들어주었고 그녀들의 지참금, 생활비, 재산으로부터 오는 후광은 딸들을 돈에 의지하게 만들었다. 고리오 영감의 부정과 사랑은 돈에 찌든 타인들에 비추면 훌륭해보이지만 돈으로 모든 걸 해결했다는 점에서 어긋난 애정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돈으로 받은 사랑과 돈으로 주는 사랑 모두를 비판하는 것으로 보인다.


  으젠은 꼼수를 써서(물론 그당시에는 흔한 방법이었지만) 출세하라고 부추긴 보트랭도 악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버지가 죽어가는데 무도회에 갈 생각만을 하는 델핀을 보며 세상에는 치사한 범죄만 날뛰고 보트랭이 차라리 더 위대하다고 말한다. 돈을 수단삼는 것보다 목적으로 두는 것에 날선 비판을 한다. 으젠은 황금과 보석으로 덮인 이 더러운 사회를 그 누구도 묘사할 수 없다고 하면서도 이야기의 마지막엔 '이제부터 파리와 나와의 대결이야'라는 도전적인 어투로 말한다. 으젠은 고리오 영감 사건을 겪으면서 성장한 셈이다. 사교계와 돈, 출세에 정면으로 맞서겠다는 의지다. 뒤에 이어질 '인간희극'에서 으젠이 어떻게 그려질지 모르지만 그가 사회와 타협하는 모습은 잘 상상이 가지 않는다. 경험을 통해 고결한 감정을 알았고, 고결한 감정이 어떻게 치사스럽고 비좁고 겉만 번지르르한 이 사회와 타협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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