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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이야기/독서 노트

아버지의 해방일지 - 정지아 (창비, 2022)

by 양손잡이™ 2023. 1. 9.

1.

아버지가 죽었다.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평생을 정색하고 살아온 아버지가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진지 일색의 삶을 마감한 것이다.


까뮈의 <이방인>을 떠올리게 만드는 첫 문단이다. 제목도 어디서 들어본 것 같다. 대부분 손석구가 출연한 ‘나의 해방일지’를 떠올릴테다. 북토크에서 작가가 말하길, 편집부에서 의도가 빤히 보이는 제목을 권해서 조금 싫었다고 한다. 소설의 소재와 다르게 책 표지는 둥글둥글하고 가볍게 그려졌다. 독자들에게 조금 가볍게 다가갈 수 있는 좋은 방법인 것 같다.


2. 소설 초장부터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죽은 아버지는 혁명전사다. 지금 나로서는 무슨 중2병 같은 이름이 있나 하겠지만, 아버지 ‘고상욱’은 실제로 빨치산으로 생활했다. 자신의 신념을 지키고자 동지들과 죽음을 무릅쓰고 총을 들고 투쟁한 것이다. 심지어 아버지의 딸이자 소설 속 화자의 이름인 ‘아리’는 부모가 활동한 산 이름에서 따왔단다(아빠 - 백아산, 엄마 - 지리산).

젊은 나이에 감옥에 수감됐다가 출소 후 고향인 구례로 내려온 아버지는 농사일을 시작했다. 하지만 농부이자 전직 빨갱이인 그는 노동이 힘들다며 몰래 빠져나와 막걸리와 소주를 마셔다. 커가면서 ‘나’는 가족에게 고압적인 아버지와 서먹한 사이가 되어 멀어지게 된다. 장례식에서 울지도 않는다. 그렇게 남인 것 같던 아버지. 장례식장에서 마주친 여러 인물들과 함께 대화하고 과거를 회상하며 아버지의 생을 돌아보게 된다.


3. 라는 게 대충 이야기의 골자다. 상당히 많은 인물이 등장하고 이들에 얽힌 과거 이야기가 서술된다. 단편적이고 다소 진부한 설정들의 이야기여서, 소설 자체로만 보면 솔직히 조금 아쉬운 편이다. 거의 모든 장면이 회상으로만 이루어진, 선호하지 않는 양식이다. 종국에 아버지를 이해하며 마무리되는 결말도 너무 쉽게 풀어지지 않았나 싶다. 내가 뭐라고 이렇게 말하나 싶지만, 나도 독자이자 소비자이니 할 말은 해야지.


4. 형식과 틀 이야기를 벗어나, 소설을 읽고 곰곰이 생각해 볼 포인트는 세 가지였다.


5. 가장 먼저, 나는 부모님을 100% 알고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다. 나는 부모님과 20년을 한 집에서 살았다. 학창시절에 공부하기에 바빴지만 매일 보는 사이였다. 이리도 가까이 붙어 있었던 우리인데, 나는 부모님을 잘 알고 있는가?

오십년 가까이 살아온 어머니도 아버지의 사정을, 남자의 사정을, 이제야 이해하는 중인 모양이었다. 나 또한 그러했다. 아버지는 혁명가였고 빨치산의 동지였지만 그전에 자식이고 형제였으며, 남자이고 연인이었다. 그리고 어머니의 남편이고 나의 아버지였으며, 친구이고 이웃이었다. 천수관음보살만 팔이 천개인 것이 아니다. 사람에게도 천개의 얼굴이 있다. 나는 아버지의 몇개의 얼굴을 보았을까? 내 평생 알아온 얼굴보다 장례식장에서 알게 된 얼굴이 더 많은 것도 같았다. 하자고 졸랐다는 아버지의 젊은 어느 날 밤이 더이상 웃기지 않았다. 그런 남자가 내 아버지였다. 누구나의 아버지가 그러할 터이듯. 그저 내가 몰랐을 뿐이다.


아버지는 정말 다양한 사람과 접점을 가졌다. 생각해보면, 인생은 하나가 아닐 성싶다. 관계를 맺은 사람마다 내가 보여지는 모습은 조금씩 다르다. 그렇다면 지인의 수만큼 인생의 갯수도 늘어나게 되지 않을까.

가끔 부모님의 과거 얘기가 궁금해 묻곤 한다. 특별할 게 없다고 생각했던 부모님이지만, 아버지의 군시절 이야기, 어머니의 빛났던 학창시절 이야기를 들으면 놀라움의 연속이다. 부모님으로 살기 전, 한 사람으로서 살 때는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부모가 된 후에도 어떤 자아와 생각으로 지냈고, 버텨왔는지. 김하나 작가의 ‘빅토리 노트’처럼, 부모님도 자신의 인생이 있었을텐데, 거기에 귀를 기울여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6. 둘째로, 인간이 소외된 이념 투쟁의 허망함이다.

아버지는 백운산에 가장 오래 있긴 했지만 이산 저산 떠돌며 48년 겨울부터 52년 봄까지 빨치산으로 살았다. 아버지의 평생을 지배했지만 아버지가 빨치산이었던 건 고작 사년뿐이었다. 고작 사년이 아버지의 평생을 옭죈 건 아버지의 신념이 대단해서라기보다 남한이 사회주의를 금기하고 한번 사회주의자였던 사람은 다시는 세상으로 복귀할 수 없도록 막았기 때문이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의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그래서 아버지는 고작 사년의 세월에 박제된 채 살았던 것이다.


아버지는 분명 빨치산으로 살았다. 국가 안보에 안 좋은 영향을 준 것은 확실하다. 사회에 위험하다고 판단과 처벌이 가능하다. 죄를 지은 사람이 있다면 그 죄에 있어서만 사람을 벌해야 하는데, 소설에서는 연좌제로 아버지의 친인척들도 벌을 받았다. 그의 할아버지는 총에 맞아 죽었고, 그 충격으로 동생은 평생 형(아버지)을 원망했다.조카는 고위공직에 오르지 못했다.

빨치산 운동은 고작 4년을 했건만, 아버지는 평생 범죄자라는 낙인이 찍혔고 사회는 그가 살아내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기 껄끄러운 주제다. 위험한 이야기일 수 있지만,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타인을 영원히 억압할 자격이 있을까? 영원한 딜레마가 될 터다. 사람이 빠진, 오로지 이데올로기만의 대립에서 소외되는 것은 결국 우리다.


7. 마지막으로, 빨치산 ‘고상욱’이 아닌 그냥 사람 ‘고상욱’을 생각해본다.

아버지는 고향에서 많은 사람과 만나고 살았다. 과거 빨치산 동지는 물론이오, 조선일보를 보는 교련선생 출신 박선생과 단짝이고, 자신을 감시하는 담당형사와 술잔을 나누기도 했다. 자신의 도움이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 소매를 걷고 찾아갔다.

“생각이 다르면 안 보면 되지, 애도 아니고 맨날 싸우면서 왜 맨날 놀아요?”
아버지는 언제나처럼 아랫목에 자리를 잡고 신문을 촥 펴면서 말했다.
“그래도 사램은 갸가 젤 낫아야.”
아버지에게는 사상과 사람이 다른 모양이었다


아버지는 사상보다 사람을 믿는 것이다. 그것이 사상과 빨치산 운동으로 발현되었지만, 뿌리에는 결국 사람이 있었다. 당시 빨치산들이 어떤 마음으로 총을 들고 투쟁했는지는 모르겠다. 우파 - 좌파, 모든 이들이 한반도라는 좁은 땅떵이에서 비극과 뒤엉켰을 뿐이다. 결국 사람 ’고상욱’은, 우리는 대단한 것 없이, 이상한 것 없이, 사람의 선의를 믿어야 한다고, 자신의 인생을 걸고 온몸으로 말하는 셈이다.


8. 소설에서 가장 가슴을 치는 문장은, 가장 마지막에 수록된 ‘작가의 말’에 있다.

사램이 오죽하면 글겄냐. 아버지 십팔번이었다. 그 말 받아들이고 보니 세상이 이리 아름답다. 진작 아버지 말 들을 걸 그랬다.


우리가 욕심, 시기, 질투, 의심을 조금만 내려놓고 상대에게 자그마한 진심을 담아 손을 내민다면 어떤 세상이 펼쳐질까. 유토피아를 바라지는 않는다. 그저 세상에 슬픔이 차츰 사라지고 웃음과 신뢰가 피어나길 바랄 뿐이다. 사람을 믿는 신념을 고수하려면 얼마나 무던해져야 할까. 아버지가 꿈꿔왔던 세상이 오기를 바라며.

아버지의 해방일지
김유정문학상 심훈문학대상 이효석문학상 등을 수상하며 문학성을 두루 입증받은 ‘리얼리스트’ 정지아가 무려 32년 만에 장편소설을 발표했다. 써내는 작품마다 삶의 현존을 정확하게 묘사하며 독자와 평단의 찬사를 받아온 작가는 이번에 역사의 상흔과 가족의 사랑을 엮어낸 대작을 선보임으로써 선 굵은 서사에 목마른 독자들에게 한모금 청량음료 같은 해갈을 선사한다. 탁월한 언어적 세공으로 “한국소설의 새로운 화법을 제시”(문학평론가 정홍수)하기를 거듭해온 정지아는 한 시대를 풍미한 『빨치산의 딸』(1990) 이래로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 아버지 이야기를 다룬다. 소설은 ‘전직 빨치산’ 아버지의 죽음 이후 3일간의 시간만을 현재적 배경으로 다루지만, 장례식장에서 얽히고설킨 이야기를 따라가다보면 해방 이후 70년 현대사의 질곡이 생생하게 드러난다. 이러한 웅장한 스케일과 함께 손을 놓을 수 없는 몰입감을 동시에 안겨주는 것은 정지아만이 가능한 서사적 역량이다. 그러나 이 소설의 진정한 묘미는 어쩌면 ‘가벼움’에 있다. “아버지가 죽었다. (…) 이런 젠장”으로 시작하는 첫 챕터에서 독자들은 감을 잡겠지만 이 책은 진중한 주제의식에도 불구하고 ‘각 잡고’ 진지한 소설이 아니다. 남도의 구수한 입말로 풀어낸 일화들은 저마다 서글프지만 피식피식 웃기고, “울분이 솟다 말고 ‘긍게 사람이제’ 한마디로 가슴이 따뜻”(추천사, 김미월)해진다.
저자
정지아
출판
창비
출판일
2022.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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