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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이야기

그날 밤, 우리들

by 양손잡이™ 2011. 4. 28.
그날 밤, 우리들


  - 예 그럼 8시에 현수역 맥도날드 앞에서 봬요.
  마지막 문장을 치고 채팅창을 닫았다. 시간은 어느새 6시 반, 슬슬 엄마가 저녁을 먹으라고 소리칠 때이다. 상대의 답을 기다릴 새가 없었다.
  “백설, 밥 먹어!”
  역시나다. 엄마는 시간을 어길 때가 없다. 얼른 컴퓨터 종료 버튼을 누르려고 하니 방문이 활짝 열렸다.
  “밥 먹으라니까.”
  빨간색 앞치마를 두른 엄마가 말했다.
  “지금 나가잖아요.”
  “또 컴퓨터 질이야?”
  “꺼요, 꺼.”
  약간 톡 쏘아 말했더니 날카로운 목소리로 엄마가 대답했다.
  “황백설, 지금 시간 영어단어 시간 아니야?”
  컴퓨터 전원은 완전히 내려갔고, 나는 책상에 있는 영단어장을 들어 흔들었다. 팔락팔락.
  “다 외웠어요. 끝.”
  엄마는 의심스런 눈초리로 단어장과 나를 번갈아 보더니 획 돌아 주방으로 들어간다. 얼른 오라는 말과 함께 말이다.
  매일 이런 식이다. 도무지 엄마는 끝을 모른다. 아직 고3도 아닌데 공부를 징그럽게 시킨다. 너는 나보다 잘난 여자가 돼야한다, 나중에 남편한테 떳떳한 여자가 돼야 한다, 어릴 적부터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왔다.
  그러는 엄마도 중고교 모두 1등으로 졸업, 대학시절도 모든 학기를 장학생으로 보냈다. 그렇게 잘 나가던 엄마도 결혼을 하니 자연스레 가사일을 맡고 집안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요컨대, 나는 엄마의 과거이자 꿈이었다..
  그러면서도 웃긴 게, 내가 좋은 성적이라도 받아오는 날엔 어김없이 와인을 잔뜩 마신다. 그러고는
  “어머 얘도, 엄마는 그 정도는 쉬웠지. 아직 멀-었구만.”
하는 거다. 분명하다. 엄마는 욕구불만일 거야. 그렇게 시켜놓고 웬 시기람.
  그래도 부모님의 머리를 그대로 받은 탓인지 학교 성적은 항상 전교 순위권이었다. 남들은 별로 노력하지도 않고 성적이 잘 나오는 내 모습을 보고 부럽다하지만 그건 엄마의 등쌀에 밀린 탓이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학교 성적과는 정반대로 나쁜 버릇이 생겼다. 처음에는 가볍게 인터넷 채팅에서 시작했는데 어찌 하다 보니 직접 사람들과 만나게 되었다.. 물론 신체적 접촉은 하지 않았다. 나도 상대를 가려 받아 그저 두세 시간 말상대만 해주고 돈을 조금 받는다. 그게 끝이다.
  오늘 저녁 8시에 현수역 맥도날드 앞에서 만날 사람도 이런 부류다. 전과 다른 게 있다면 여태껏 만난 사람들보다 많이 젊다는 것과 채팅 중에 요상한 말을 했다는 것.
  - 그러니까, 나도 여자가 되고 싶었는데 말이에요.
  어떡하다 보니 이 황백설이 카운슬러 노릇까지 하는구나. 하긴, 요새 만나는 사람들은 백이면 백 이런 사람들이었다. 어른들도 역시 사는 게 힘든가 보다.





  “조심히 다녀오고, 차 조심하고.”
  “예에, 걱정 붙들어 매십사.”
  저녁 7시, 평소대로 독서실을 간다는 핑계로 집을 나섰다. 만나는 지점은 언제나 현수역 부근이다. 지하철로 40분 정도 떨어진 곳이다. 아는 사람들의 눈을 피하려고 고른 장소였다. 게다가 빌딩이 즐비한 곳이기 때문에 학생이나 선생들이 올만한 곳이 아니었다. 지난 1년 동안 한 번도 학교 사람들을 만난 적이 없었다.
  현수역에 도착하여 출구로 나가 맥도날드 입구 앞을 쓱 훑어보았다.
  남색 후드티, 청바지, 키가 큼, 나이는 20대 중반… 오호라 저기 있구만.
  키는 185정도, 진한 검은색 머리, 눈이 크고 코가 오똑함, 패션은… 좀 그저 그렇구만. 아니, 멀쩡하게 생겨서 왜 채팅방에서 사람을 구한 거야?
  “안녕하세요?”
  나는 조심히 인사를 했고 그는 수줍게 웃으며 나를 맞아주었다. 그리고 배가 고프니 햄버거라도 먹잖다. 저녁을 먹고 왔다니 그럼 자기라도 먹는단다. 생긴 건 멀쩡한데, 조금 이상타.
  세트를 하나 들고와 테이블에 앉았다. 감자튀김을 권했지만 사양했다.
  “오늘 햄버거 같이 먹자고 부른 거에요?”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그는 우물거리며 말했다. 다 먹고 말해줄게. 그는 다시 햄버거로 시선을 내린다.
  금세 쟁반을 다 비우고 빤히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는 싱긋 웃었다.
  “전 사실 로봇이에요.”
  “예?”
  무심코 크게 반응해버렸다…. 사람들이 모두 우리를 쳐다보자 얼굴이 달아올랐다. 다시 모두들 자기 얘기로 돌아가자 그에게 조용히 말했다.
  “뭐라구요?”
  “전 로봇이라고요.”
  …지 혼자 햄버거를 먹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그의 이름은 민호였다.
  “그러니까, 저희 할아버지가 절 만드셨다니까요?”
  저명한 - 하지만 이름을 처음 들어보는 - 과학자인 그의 할아버지는 로봇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냥 로봇이냐, 아니, 감정과 지성을 가진 로봇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전 여자가 되고 싶었지요.”
였다.
  “가슴 속은 여자인데 눈을 떠 몸을 훑어보니… 볼 게 못 되더라고요.”
  그는 냅킨으로 손을 닦았다.
  “그리고 감성과 지성을 가졌으니까, 이왕이면 사람이 되고도 싶고요.”
  그는 할아버지에게 몇 번이나 이 사실을 말해보려고 했었다. 하지만 워낙 완고한 사고를 가진 할아버지였기에 쉬이 그 말을 못 꺼냈다고 한다.
  “그것 때문에 우울증에 걸렸다니까요.”
  로봇이 우울증이라니, 과학은 역시 신비하다.
  맥도날드를 나와 얘기를 나누며 거리를 걸어 다녔다. 그는 자기 주변에 여자가 없다고 한다. 그래서 내게 여자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학교도 다니다가 적응하지 못해서 그만 두고 현재 할아버지와 연구소에서 지낸단다.
  언니가 하나 생긴 셈 치고 여기저기 쏘다녔다. 여자의 직감으로 이 사람은 위험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진즉에 알아챘다. 함께 백화점에 여성의류코너로 가서 서로 잘 어울리는 옷을 고른다고 난리였다. 물론 점원들의 눈초리가 예사롭지 않았지만 별로 신경쓰진 않았다. 언니랑 쇼핑하러 왔는데 어때.
  렇게 아이쇼핑을 마치고나니 어느덧 시간은 11시였다. 슬슬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슬슬 갈 시간이네요.”
  “그래, 재밌었어. 나중에 또 만날 수 있지?”
  “그럼요.”
  나는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좋은 사람을 만났어. 알고 보니 돈도 많았다. 나쁜 목적으로 사람을 만나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경제적 부담은 어느 정도 털었다.
  지하철역 가는 길에 술집이 잔뜩 있었다. 빠른 걸음으로 거리를 지나는데 한쪽 골목에서 새된 목소리가 차례대로 들렸다.
  “아, 이 아저씨가! 떨어져!”
  뭔 일인가 살짝 보니 한 뚱뚱한 아저씨가 어린 여자에게 매달려있었다. 어둔 골목에서도 반짝이는 옷으로 봐서 술집여자인 듯했다. 아직 11시밖에 안됐는데 벌써 저 꼴이라니.
  “이봐, 신혜 양, 조금만 더 마시자고~”
  뚱뚱한 아저씨는 여자에게 계속 매달렸지만 그녀는 싫다며 아저씨를 떼어놓으려 애를 썼다.
  그 꼴을 보던 민호오빠가 나섰다.
  “아저씨, 그만 하세요.”
  여자가 되고 싶다더니 용기는 어디서 난 건지. 오빠가 술주정을 하는 아저씨를 살짝 쳤다. 술에 많이 취했는지 힘없이 쓰러졌다. 그리고 바닥에서 코를 골며 자기 시작했다.
  여자는 한숨을 쉬곤 우리를 쳐다봤다.
  “뭐야, 오빠도 나랑 술 한 잔 하려고?”
  헛웃음이 나왔다. 사람을 도와주니 되레 소리를 치네. 민호오빠는 어깨를 으쓱 하곤 골목을 나왔다. 여자도 따라 나왔다.
  흠, 짙은 화장을 하고는 있지만 상당히 어려 보인다. 가로등 불빛이 여자의 머리를 옅은 갈색으로 물들였다.
  “나랑 좀 놀아줘.”
  여자가 찌뿌듯하게 말했다.
  “지금 들어가면 사장한테 혼난단 말야.”
  우리는 다시 지하철역 방향으로 걸었고 여자는 우리 뒤를 쫓아왔다.
  홱 돌아 그녀에게 말했다.
  “왜 따라와요?”
  눈을 흘깃하자 여자는 웃었다.
  “어머, 너는 말투가 왜 그래. 몇 살이니?”
  “18살인데요?”
  톡 쏘았더니 또 웃는다.
  “친구끼리 왜 그러니, 참~”
  “네?”
  “친구끼리 너무 그러지 마~”
  여자, 아니 여자애는 배시시 웃는다.





  
“이름이 황백설이라고?”
  신혜는 나와 같은 18살이었다.
  “얼굴도 이쁘장하고 이름도 이쁘장한데 성이 에러다, 에러.”
  신혜는 계속 우리 둘의 뒤를 따라왔다. 이름을 가르쳐주니 놀려댔다. 화를 내려고 했지만 그럴 때마다 신혜는 생글생글 웃었다.
  “신혜씨는 어쩌다가 그런 일을 시작했나요?”
  민호오빠가 분위기도 풀 겸 신혜에게 말을 걸었다. 신혜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뭐, 꽃다운 나이에 이 일 하는 거면 따로 이유가 있나요.”
  돈이나 밝히고 명품이나 사고 싶어서겠지. 맘속으로 중얼거렸다.
  신혜가 계속 말했다.
  “아빠는 찢어지게 가난해, 그 와중에 새엄마랑 새언니들은 자기네들 살기 바빠, 도무지 날 챙겨줄 사람이 있어야지.”
  민호오빠와 나는 신혜를 빤히 바라보았다. 신혜는 길가의 많은 가게들을 보고 있었다. 그 눈으로 너무나도 환한 밤의 불빛이 반짝였다.
  우리 셋은 한참 말없이 거리에 서있었다.
  시간은 조금씩 흐르고 있었다. 주위는 곧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사람들과 그들을 부축하는 이들로 북적거렸다.
  시끄러웠다.
  많은 사람들이 아무 의미 없는 말을 고래고래 지껄이며 우리 곁을 지나갔다. 여기저기 술내가 진동했다. 어지러웠다.
  “으악!”
  젠장, 잠시 멍하니 있다 핸드폰을 보니 12시가 넘었다. 집으로 가는 마지막 지하철은 벌써 떠난 뒤였다.
  어떡하지. 핸드폰을 쥔 손에서 땀이 났다.
  “왜 그래?”
  신혜는 이상한 눈으로 내게 물었다.
  “막차가 끊겼어! 어떡해!”
  나는 발을 동동 굴렀다. 그저 시끄럽던 주위가 괜스레 무섭게 다가왔다. 술에 취한 사람들이 모두 나를 보는 것만 같았다. 모든 소리가 내게만 오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구원의 눈길로 민호오빠의 얼굴을 보았지만 오빠는 살짝 웃으며 어깨만 으쓱했다.
  “뭐 있니, 오늘 집에 안 들어가면 되지.”
  또 웃으면서 말하는 신혜였다. 나는 여전히 걱정스런 눈으로 신혜를 바라보았다.
  “하루 정도로 뭘 그리 걱정해.”
  왠지 모르게 그 웃음에 안도감이 들었다.





  
우리 셋은 강 둔치에 누웠다. 주위엔 아무도 없었다.
  “첫 가출을 기념하며!”
  신혜는 크게 웃으며 맥주캔을 높게 치들었다. 신혜가 민호오빠를 조르고 졸라 산 맥주였다. 나는 조용히 맥주를 홀짝거리며 걱정스레 말을 꺼냈다.
  “핸드폰도 꺼놨지, 연락도 안 되지, 엄마한테 죽었다.”
  후우, 한숨을 쉬고 맥주 한 모금을 들이켰다. 목이 따끔했지만 웃음이 새어나왔다.
  “얘, 늦바람이 무섭다고, 미리 가출 안해보면 안돼.”
  “사실 나도 가출은 처음이야.”
  신혜의 능청스런 말에 이어 민호오빠도 웃으며 대답했다. 벌써 두 캔 째다. 취기가 약간 도는지 헤벌레 웃으며 잔디에 누워있었다.
  “그래그래, 지금 아니면 나중에 폭발해버릴지도 모른다고.”
  신혜도 잔디에 누웠다. 나는 조용히 둘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술 때문인지 둘 다 웃고 있었다. 나는 휘유, 한숨을 쉬고 남은 맥주를 모두 들이켰다.
  잔디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에 박힌 수많은 별들이 보였다.
  “나도 날 걱정해주는 엄마가 있었으면 좋겠네.”
  신혜가 하늘로 손을 뻗으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주먹을 쥐락펴락하였다. 마치 별을 잡고 싶다는 듯.
  나도 입을 열었다.
  “나는 너처럼 자유롭게 살고 싶어.”
  그러자 자기 차례라도 기다렸다는 듯 민호오빠가 말을 꺼냈다.
  “너흰 적어도 여자잖아.”
  아무렇지도 않게 꺼낸 그 말을 듣고 왠지 너무 우스웠다. 신혜와 나는 배꼽을 잡고 크게 웃었다. 웃음소리가 둔치를 가득 매웠다.
  “웃지 마, 진심이라고.”
  민호오빠는 약간 삐진 듯이 중얼거렸다. 나는 헥헥거리며 웃음을 멈췄다. 너무 웃어서 배가 당겼다.
  “어른들이 술 마시고 괜히 막 웃는 게 아니었어. 아, 행복해.”
  신혜가 크게 소리쳤다. 그리고 숨죽여 큭큭 웃었다.
  위로 보이는 천장에 점점이 박힌 별들을 바라보았다. 어릴 적 방 천장에 붙인 야광빛 별이 떠올랐다.
  바람 때문인지 별빛이 흔들렸다. 소매로 눈가를 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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