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어릴 적 첫 글쓰기, 그것도 창조적 글쓰기의 시작은 과연 일기 쓰기였다. 학기 중에는 착실히 쓰던 일기였지만 역시 방학 때는 무리였다. 항상 개학 일주일 전에 연필을 들어 두 달 전의 일을 지어내곤 했다. 도무지 쓸 내용이 없다하면 대충 지은 동시 - 도무지 시라고 할 게 못된다 - 로 때우곤 했다. 그런 초교 시절을 보내고 일기 쓰기를 하지 않던 중학생이 되었다. 다행히 판타지 소설을 접하고 나름의 창작열을 피웠다. 하지만 노력도 열정도 없던 내게 글쓰기는 큰 벽이었다. 게다가 고등학교 때 이과로 진학하면서 더욱 글쓰기와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때는 논술이란 내게 파도와도 같았다. 써도써도 앞으로 가는 일이 없었다. 다시 내게 돌아올 뿐이었다. 글을 잘 쓰고 싶다, 이런 마음은 25년 평생 가지고 있으면서 열정이 없다. 이게 가장 큰 문제가 아니었을까?
내 글쓰기의 원천은 여전히 '나'이다. 나에게 솔직한 이야기 한 편을 쓰고 싶어서 그토록 바라왔건만 써둔 일기를 보면 여전히 단순한 글자모음이었다. 적어도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쓰려고 노력했지만 글과 소설이란 지금의 나에게는 아무리 뛰어도 닿지 않는 천장이었다. 주위에는 책 깨나 읽었고 글을 쓰는 것이 취미인 별종으로 알려져 있지만 막상 가까이서 보면 그네들과 전혀 다른 것이 없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바로 '척'이었다. 고상한 척, 잘난 척, 온갖 척척척. 글을 쓸 때도 뭔가 있는 척 하면서 문장을 내려갈겼다. 남들에게 내 모습을 속이려 가면을 썼는데 결국 나 자신조차 내 얼굴을 잊어버린 꼴이다. 잊고선, 잃었다.
어느 노트는 도무지 장 구분이란 것도 없이 그저 처음부터 끝까지 한 덩어리 치즈처럼 엉겨 붙어버려 숨 쉴 곳도, 생각할 틈도 주지 않았다. (중략) 그 노트들을 들처본 나는 곧잘 "세상에, 이런 쓰레기들을 보았나!"라고 말하면서 내던져버리곤 했다. (172쪽)
주인공인 인영이 계동 주부들의 글감 노트를 보며 한숨을 쉰다. 보잘 것 없는 이야기. 사춘기 때의 전혀 잔잔하지 않은 첫 사랑 이야기, 집에서 먹는 요리의 레시피, 인영의 눈에는 다 쓰잘데기 없는 이야기다. 삶에 구원도 되지 않을 이야기, 문학적 성취감이 없는 이야기, 모조리 쓰레기다. 하지만 저런 쓰레기들이 곧 자신의 문학이다. 글쓴이 자신에게 중요하지 않은 일이 어디 있을까? 모든 이야기 하나하나가 추억이고, 그 추억이 나를 정립한다. 그리고 너무나 우스운 것은, 나는 그런 쓰레기조차 써내려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너는 뭘 쓰려고 하기 전에 그 잘난 척하는 태도부터 고쳐. 글 쓰는 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구. 도대체 뭘 믿고 그렇게 시건방진 거니?" (181쪽)
그러니까, 사실 글쓰기라는 건 쉬운 일이다. 아니, '이다'보다는 '이란다'가 어울리겠다. 글쓰기 관련 서적을 보면 모두 그렇게 말한다. 우선 주위의 사소한 것부터 말을 하라고 말이다. 적어도 이 말을 일백 번은 들었을 성싶다. 들었을 때는 뭐 그정도야, 하고 끄덕거리는 내용이지만 항상 거기부터 막히곤 했다. 글쓰기의 시작이라는 곳에서 막혔으니 그 뒤는 어떠했겠는가. 기본도 없으면서 저 위를 탐했으니, 무너질 수밖에. 와르르르.
김 작가는 너무나 글이 쓰고 싶어서 죽을 수가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310쪽)
과연 죽기 전에 나는 무엇을 후회할까? 어릴 때에는 여자 손 한 번 못 잡아보고 죽는 것, 한창 책을 읽을 적에는 아직 세상에 읽어보지 못한 책이었다. 지금은 과연 어떠할까. 나도 김 작가처럼 글을 쓰고 싶어 안달이 나 저승사자의 손을 뿌리치고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 글쎄, 당장은 글쓰기 행위 자체에 미련이 일지 않는다. 단지 예전에 끼적였던 낙서들을 남이 볼까 참 무섭다. 내가 죽고 나서 그 낙서들을 후회하지 않게 노력하련다.
(2011년 5월 2일 ~ 5월 3일, 3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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