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차 - 미야베 미유키 지음, 이영미 옮김/문학동네 |
039.
언제나와 같이 짤막한 감상 전에 작가에 대해 말해보고 갈까요. 미미여사로도 불리는 미야베 미유키의 책입니다. 상당히 다작하는 작가인데 전 아직 세 작품(<용은 잠들다>, <크로스 파이어>, <브레이브 스토리>)밖에 안 읽어봤네요. 작가 이름만 봐도 믿음이 간다는 분들도 많다네요. 다작만 하는 게 아니라 적어도 어느 정도 평작은 쳐주는 보증수표 같은 존재인가 봅니다. 단순히 미스터리만 쓰는 작가인줄 알았건만 판타지나 SF, 시대극까지 손을 댈 줄 아는, 능력 있는 분이었습니다. 아이 부러워. 그런 분이 쓰신 사회파 미스터리 소설 <화차> 역시 평균 이상이었습니다. 굳.
얼마 전에 개봉한 한국 영화 '화차'의 원작소설인데 무려 1992년 작품입니다. 이 작품으로 야마모토 슈고로 상을 받았고,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역대 20년 총결산에서 1위를 했다는군요. 개인적으로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는 나오키나 아쿠타가와 상보다 좋아하는 타이틀입니다. 역시 꾸준히 많은 책을 봐야겠어요. 진짜 작품은 의외의 곳에서 나오기 마련이니까요.
책은, 무릎이 총알에 다쳐 휴직한 형사 혼마로부터 시작합니다. 아내의 사촌오빠의 아들(사실 이 책에서 가장 궁금한 것은- 이 사람이 육촌인가 아니면 다른 호칭인가!) 이 갑작스레 혼마를 찾아옵니다. 결혼하려는 여자에게 신용카드를 만들어주려 했더니 파산한 여자라고 카드 발급이 안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다음날, 그런 소식을 알릴 새도 없이 여자는 잠적해버렸답니다. 의아한 마음으로 친척의 부탁을 받은 혼마는 여자의 파산을 맡았던 변호사를 찾았고, 변호사에게 충격적인 말을 듣습니다. 혼마가 알고 있던 여자와 변호사가 알고 있는 여자는, 이름만 같지 생김새가 전혀 다른 사람이었지요. 그러니까, 이 여자는 다른 여자의 신분을 사칭해 살고 있던 거지요.
혼마가 본격적으로 수사에 착수하는 게 이 시점입니다. 책을 나흘에 걸쳐 천천히 봤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흐름이 늦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변호사에게 들은 충격적인 말, '당신은 나에게 다른 사람 얘기를 했어요' 부분이 겨우 80쪽밖에 안 되는 거 있죠. 남은 400쪽을 어떻게 풀어나갈까 두꺼운 책을 만지며 한숨을 쉬었는데 웬걸, 몰입도가 엄청납니다. 한번 책을 펼칠 때마다 적어도 100쪽씩은 읽고 덮었습니다. 행방불명된 한 여자를 찾는 데서 시작한 사건은 스케일이 점점 커지고 심각해져갑니다. 자잘한 증거를 모으고 여러 인물들에게 도움을 받으며 실체를 파악하는 혼마. 여타 미스터리 소설이 그렇듯 증거들을 우연히 발견하고 전혀 연관이 없을 것 같던 증거들은 하나씩 꿰어맞추다 보면 그럴 듯하게 들어맞지요. 조금 구식인 듯하면서도 오히려 직설적인 이 장치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페이지는 정말 슈슈슉.
물-론 모든 작품은 약점이 있기 마련입니다. 중간에 변호사가 신용카드와 카드돌려막기와 신용불량자에 대해 말하는 긴 부분은 새겨들을 만한 내용이면서 무척이나 지루했습니다. 아니, 스토리진행은 하나도 없고 무려 30쪽에 걸쳐 사회현상과 짜잘한 이론에 대해 말한다면 어느 누가 지루해하지 않고 버팅기겠습니까. 중요한 부분이긴 합니다만.
흔히들 우리나라와 일본은 10년의 시대차가 난다고 하지요. 우리나라에서도 카드대란이 있었지만 일본은 조금 더 이른 때에 이런 심각한 일이 대두됐나봅니다. 카드 때문에 부채가 생긴 많은 사람들, 이 사람들에게 문제가 생긴 이유는 사람 자체보다 부(한자로 부)라는 허상의 이미지를 덧씌워 이익만을 좇는 사회, 그리고 그런 것을 제대로 인지시키지 않았는데도 열심히 권하는 사회가 문제라고 말합니다.
뱀이 탈피하는 이유는, 껍질을 벗다 보면 언젠가 다리가 생길 거라는 믿음을 갖기 때문이라고, 작중 인물이 말합니다. 중간에 포기하는 뱀들에게 다리가 있는 것처럼 비춰주는 거울을 파는 뱀도 있다는 사실. 그리고 많은 뱀들은 생기지도 않을 발을 위해 빚을 내서라도 거울을 사고 싶어합니다. (346, 347쪽) 보통 신용불량자를 보는 시각은, 그거지요. 네가 못났고 돈을 그리 헤프게 쓰니 신용불량자가 되지, 쯧쯧쯧. 그런데 돌이켜보면, 그들도 그들 나름대로 삶에 대한 갈망이 있었을 뿐 아닌가요. 남보다는 아니어도 남만큼은 살고 싶다는, 지극히 평범한 욕구를 가지면서요. 그런데 우리를 비추는 거울이 마치 마술쇼의 거울처럼 우리 모습을 왜곡시켜 착각하게 만듭니다. 네가 바라는 행복은 다른 게 아냐, 바로 무언가를 갖는 거야. 다들 착각에 빠져 살게 말입니다.
큰 줄기의 이야기 외에 아주 작은 이야기로 혼마의 아들, 사토루가 잠깐 등장합니다. 사토루와 친구 갓짱이 귀여워하던 강아지가 있는데, 다른 또래 친구가 이 강아지를 때려 죽입니다. 사토루는 그 사실에 대해 화를 냈지만 가사도우미의 말을 듣고 화를 삭힙니다. 가사도우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남한테 못된 짓을 하는 사람은 자기가 왜 그러는지 제대로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말이지요. (413쪽) 아주 짧은 대목인데요, 이 책이 그린 사회의 어두운 면을 전체적으로 꿰뚫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캬, 역시 일류 작가는 달라도 뭐가 다르단 말예요. 하지만 이렇게 안 좋은 모습만 보이던 범인도 뒤지다보니 인간적인 면도 있더이다. 그래서 혼마는 범인을 잡아 실상을 밝히겠다는 마음보다, 안다 네 마음 다 안다 그러니까 얘기해보자,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된 거겠지요. 범인이나 자기나, 세상이 주는 헛된 상상에서 영원히 맴도는 존재임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기 때문 아닐까요.
하여간, 간만에 만난 수작입니다. 한동안 사회파 미스터리보다 본격이나 정통을 많이 봤는데, 역시 일본 장르문학 하면 사회파 미스터리 네가 최고야 하고 엄지손가락 척 올립니다. 읽을거리뿐 아니라 생각할거리까지 함께 제공한 이 책에 심심한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너무 긴 장편이라 중간중간 솎아내야 할 부분도 분명 있지만 이야기 흐름을 따라가다보면 그런 건 눈에 들어오지 않지요. 영화는 원작을 따라가지 못했고 결말과 세세한 설정이 조금 다르다 하니, 책 한번 펴보시라우 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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