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의 기술 - 밀란 쿤데라 지음, 권오룡 옮김/민음사 |
031.
소설의 존재 의의에 대한 글을 볼 때면 매번 가라타니 고진이 떠오른다. '문학은 이미 죽었다'는 그의 말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아프다. 동시에 쭉정이 책이 많은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면 그것 또한 마음이 아프다. 마음과 영혼을 흔들 정도의 책은 찾아보기 힘들다. 문학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을 진즉에 잃었다는 것에 어느 정도 수긍할 수밖에 없다. 한때 한국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든 사회고발적 소설은 단지 내용이 충격적이어서이지, 가라타니 고진이 말했던 '살아 있는 문학'이 가진 힘 때문은 아니다.
데뷔작 <농담>부터 대표작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웃음과 망각에 관한 책>까지 숱한 소설을 써온 세계의 문호 밀란 쿤데라에게 소설이란 어떤 의미일까. 소설에 대한 에세이, 그가 존경해 마지않는 소설가(카프카, 헤르만 브로흐 등) 평론, 자신의 소설론, 대담, 연설문으로 잘 짜인 <소설이 기술>에서 쿤데라는 여전히 소설의 힘을 믿는다. 기술의 발전속도만큼 세상은 빠르게 진화했다. 지식이 진보하면 할수록 사람들은 자신의 시야에서 총체상을 잃어버리고 결국 자신을 망각하게 된다. 우리는 매스미디어와 함께 살지만 끝없이 증식하는 매스미디어와 달리 한없이 작아진다. 소설의 존재 이유가 우리를 '존재의 망각'로부터 지키는 것이라면 오늘날 소설의 존재는 그 어느 때보다 더욱 필요하다고, 쿤데라는 역설한다.
<소설의 기술>은 쿤데라를 쿤데라를 새로 읽게 하는 힘을 가진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인물과 장(章)이 가진 약호나 상징을 찾아볼 수 있다. 몇 개의 단어는 그것들이 상징하는 인물과 여러 개의 사건이 함께 뒤섞인다. 그러면서 작가의 손에서 창작된 게 아닌 실존의 본질적 문제를 포착하는 실존적 약호로 탈바꿈한다. 테레자는 '현기증'이란 열쇠어가 있다. 이는 토마시와의 사랑에 지쳐 그녀의 원래 출신의 '저속한' 곳으로 돌아가면서 느끼는 감정이다. 테레사와 쿤데라에게 현기증이란 피로에 지쳐 느껴지는 단순한 증상이 아닌, '자신의 허약함에 도취되고 그에 취해 더욱 허약해지고 싶어하며 종말에는 땅바닥보다 낮게 가라앉고 싶은 것'으로 진화한다.
쿤데라는 소설의 열쇠어뿐 아니라 다른 열쇠어도 소개한다. 다소 생소한 체크어(체코, 보헤미아 등의 모국어)로 쓰인 쿤데라의 소설은 타국어로 번역이 반드시 필요하다. 번역가들은 프랑스어 판을 놓고 중역을 하기도, 하나의 문단이었던 긴 문장을 짧게 조각내기도 했다. 이에 번역가들이 쿤데라에 대해 '고민'하도록 쓴 것이 쿤데라 자신의 열쇠어와 그가 좋아하는 단어들에 대한 사전이다. 쿤데라를 대표하는 '가벼움'이란 단어를, '자신의 삶을 짓누르는 공허의 무거운 가벼움을 느꼈다'고 표현하여 읽는 이를 묵상하게 만든다. 또한 그의 존재 이유인 '소설'은, 작가가 실험적 자아(인물)를 통해 실존의 중요한 주제를 끝까지 탐사하는 위대한 산문형식이다.
<소설의 기술>의 한 축을 쿤데라와 그의 소설이 담당한다면 다른 한 축은 그가 존경하는 소설가들이다. 특히 <몽유병자들>의 헤르만 브로흐, <변신><성><소송>의 카프카를 각각 한 장에 배치하였다. 보로흐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내리는 결정에서 비합리적인 것이 맡는 역할에 대해 탐구한다. 카프카는 요제프 K에게 아무 이유 없이 벌을 줌으로써 벌이 잘못을 만드는 부조리함을 표현한다. 두 작가의 작품 모두 비합리적 체계를 다루면서 모든 행위의 바탕에는 혼동의 체계인 비합리적 체계가 한 사람이 아닌 정치적 생활까지도 지배한다는 것을 일깨워 준다. 쿤데라의 소설이 사회주의 체제와 부조리함에 대한 풍자적 내용을 담은 것으로 보아 앞의 작가들에게 영향을 받고 그들과 정신적 유대감이 강했으리라고 감히 추측할 수 있다.
<소설의 기술>은 쿤데라에게 익숙한 독자들에게는 그를 새롭고 다르게 보여주는 반면, 그와 친해지기 위해 막 악수자세를 취하는 이들에겐 다소 소화하기 힘든 책이다. 쿤데라의 소설을 읽지 않았다면 엄두도 못 낼 판이다. 그의 소설을 읽고 글이 주는 지적 매력을 느꼈다면 반드시 펴볼 만하다. 쿤데라와 더불어 보로흐, 카프카도 함께 탐독한다면 <소설의 기술>이 더욱 흥미롭게 다가오지 않을까. 우리는 아직도 그들의 소설이 그려낸 시대에 살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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