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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이야기/독서 노트

익숨함은 곧 공포 - 고의는 아니지만 (구병모)

by 양손잡이™ 2013. 6. 10.
고의는 아니지만 - 8점
구병모 지음/자음과모음(이룸)



054.

  우리는 공포라는 감정을 어디서 느끼는가. 사람이 가장 무섭게 느낀다는 10m의 다이빙 대에서 투명한 물을 바라볼 때? 담력시험을 위해 들어간 한밤의 폐가에서 삐걱대는 문소리와 어디서 들려오는 지 모르는 발걸음 소리를 들을 때? 어떤 미친 놈이 칼을 들고 클클클 낮게 웃으며 내 뒤를 천천히 따라올 때? 사람마다 공포를 느끼는 이유는 제각각일 것이다. 하지만 앞서 말한 것들은 평범과 거리가 먼, '낯섦'에서 오는 감정이다. 태어나서 10m 높이의 다이빙대에 올라갈 일이 얼마나 있을까. (사회가 흉흉하지만) 칼을 들고 거리를 방황하는 사람을 만나기는 어렵다. 또한 너무 뻔한 공포의 클리셰 아닌가. 저런 상황이라면 누구나 무서움을 예상할 수 있다.

  더 큰 공포는 예상하지 못하는 데서 온다. 이 예상 외의 상황이 우리가 상상하지 못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낯섦을 떠나 상식 밖, 즉 인지불가능한 지점에 도달하고 낯섦의 효과는 더욱 증폭된다. 스티븐 킹의 단편 '안개'와 동명인 영화 '미스트'에서 안개가 인물들의 시선과 함께 논리적 체계를 완전히 막았듯이 '미지'라는 개념은 인간의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잃게 된다.

  하지만 우리가 느끼는 진짜 공포는 익숙함에서 발아한다.

  <고의는 아니지만>(이하 <고의>)은 <아가미>와 <위저드 베이커리>라는 걸출한 작품을 써낸 구병모의 2011년도 단편집이다. <위저드 베이커리>로 제2회 창비청소년문학상을 수상하였고 <아가미>가 성인 독자를 타겟으로 했다지만 다소 청소년 문학을 지향하는 것처럼 느껴지듯이, 이 여류 작가는 다소 영(young)한 작품으로 기억된다. 앞서 발표한 장편은 판타지성을 짙게 띄는 반면 <고의>는 그보다는 조금 더 현실적이다. 현실적이기 때문에 같은 사건을 다룬다 해도 느껴지는 감정은 사뭇 다르다. 판타지에서 마법과 검기가 난무하는 칼부림과, 현실에서 눈을 부라리고 커터칼을 휘두르는 난동을 비교하면 다소 비약일까?

  <고의>는 7개의 단편으로 구성되었는데 그 중 백미는 단연코 표제작인 '고의는 아니지만'이다. '고의는 아니지만'은 유치원 여교사 F가 아이들을 가르치며 일어나는 이야기를 다룬다. F는 굳건한 자신만의 교육철학을 가졌다. 준비물을 챙겨온 아이들과 그렇지 못한 아이들을 구분해 다른 교육을 시킨다.(준비물을 챙겨오지 못하는 아이들의 부모님은 대부분 편부모거나 막노동을 한다) 그녀에게 이 분류는 차별이 아니라 조금 다르더라도 모두를 가르치겠다는 의지이다. 하지만 어린 아이들도 눈치가 있는 법이다. 준비물을 챙겨오지 못한 아이들은 풀을 잔뜩 묻힌 손가락으로 핑거페인팅을 하지만 옆 테이블에서 도구를 이용하여 비교적 고급스럽게 보이는 미술활동을 인지한다. 단순히 준비물 유무로 미술시간에 갈라졌던 아이들의 자리는 누군가의 지시가 없는 이상 그대로 유지될 것이다. F는 평등한 교육을 위해 많은 배려를 한다고 하지만 아이들에겐 그저 '다름'이 주는 불편함이 너무도 싫다. 준비물을 준비해오지 않는 데 화가 쌓이고 쌓인 F는 담장 밖에서 '막일'을 하던 인부들을 가르키며, 아이들에게 너희도 나중에 '저런 일'을 하며 살고 싶냐고 소리친다. 그리고 인부 중 몇이 밤에 F를 쫓아 혼쭐을 내주려다 살인을 저지르고 만다. 이야기에서 표면적으로 다루는 불평등에 대한 시선과 자신이 정의라고 생각하는 얄팍한 자존감이 매우 불편하게 다가온다. 게다가 제목인 '고의는 아니지만'이 주는 의미가 더해져 더욱 심각한 의미로 다가온다. F는 선의를 통해 아이들을 보듬으려 했다. 하지만 자기 머릿속에 있는 본능적인 '다름'에 대한 선입관(즉, 다름=틀림)이 점점 자라나는 동안 이를 다스릴 방법이 없었던 셈이다. F뿐 아니라 반 아이들에게서도 어릴 적부터 자각 없이 자동적으로 습득되는 불평등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려고 했던 건 아닌데 나도 모르게, 라는 변명은 얼마나 구차한가. 또한 고의가 아니라는 사실에서 자신을 원천부정하면서까지 마음에 숨겨져 있던 욕망을 한껏 발산하는 모습을 어둡게 표현한다. (이는 다른 글 '어떤 자장가'에서 더욱 기괴하게 그려진다)

  7편의 단편 모두 좋진 않았지만 이전에 알던 구병모의 모습을 완전히 벗겨 작가의 이면을 알 수 있는 데서 오는 쾌감(?)과 일상에서 느낄 수 있는 익숙한 심리적 표상을 천천히 뜯으면서 겪는 이질감을 동시에 읽을 수 있었다. 별 거 아닌 소설로 생각하며 폈지만, 무섭다. 참으로 무서운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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