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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이야기/독서 노트

문구의 모험 - 제임스 워드 (어크로스, 2015)

by 양손잡이™ 2016. 2. 21.
문구의 모험 - 8점
제임스 워드 지음, 김병화 옮김/어크로스



독후감을 쓰려다가 잡담로 선회




2015-058.


  온갖 문구류의 역사를 기술한 책이다. 단순한 역사의 나열임에도 한참 핫했던 이유는,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더러 문구도 좋아하기 때문이렸다. 적어도 난 그렇다. 책을 읽다가 괜찮은 구절이 나오면 포스트잇으로 표시를 해두고, 간단한 소감은 컴퓨터보다 노트에 볼펜으로 적는다. 때로는 어떤 필기도구가 맘에 드나 바꿔가며 시험한 적도 있다. 심지어 잉크 색이 마음에 안 들어 엊그제 채운 잉크를 싹 비우고 다른 색의 잉크를 넣기도 했다.


  미국의 문구 덕후가 이 쓴 책은, 사실 감상을 쓸 것이 없다. 나는 전문 서평인이 아니니까 책이 주는 중심 메시지를 잘 못 읽어낸다. 이런 류의 책은 감상이 사변적으로 흐르기 쉽다. 그런고로 형식이고 뭐고 내 이야기나 주구장창 하면 되지 뭐. 책은 저자의 손을 떠난 순간 독자의 것이고, 책을 읽은 이들은 자신만의 책을 기억한다. 부제도 '당신이 사랑한 문구의 파란만장한 연대기'니까, 내가 사랑하는 문구에 대해 털어놓으면 된다.


  가장 먼저 접한, 글씨를 쓰는 도구는 아무래도 연필이 아닐까 싶다. 크레파스나 색연필은 글씨를 쓴다기보다는 그리기에 바빴으니까, 적어도 나에게는 큰 의미가 없다. 게다가 난 그림 그리기를 싫어한다.


  한 자루에 백 원. 싸디 싼 필기구의 기초. 솔직히 고백하자. 한뼘 정도 되는 연필 한자루를 끝까지 써본 적이 거의 없다. 부모님 세대에는 없어서 못 쓰던 연필을 계속 깎아서 쓰다 나중엔 볼펜 깍지에 꽂아서 썼다고 한다. 물론 나도 그렇게 썼지만, 연필 아까운줄 모르고 한 손에 안 들어온다 싶으면 버리고 새 연필을 꺼냈다. 아니, 사실은 다 쓰기도 전에 잃어버린 적이 훨씬 많을 것이다.


  작년 1월에, 올해에는 열심히 일기와 독서 기록을 쓰자며 필기구를 골랐다. 기존에 즐겨 쓰던 만년필과 볼펜이 있었지만 뭔가 다짐을 굳게 먹고 싶었다. 그러면서 멋까지 챙긴다면 금상첨화. 허세가 가득 차 세계에서 유명한 주황색 연필, 파버카스텔 보난자 연필 한 더즌을 샀다. 당시 한 자루에 오백 원이 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만 원 가량 돈을 들여 산 연필은... 아직 책상에 고이 모셔두었다. 한 자루만 절반 정도 사용했는데, 이만큼 사용한 것도 용하단 생각이 든다.



이제 한 자루를 반 정도 썼다



  개인적으로는 글을 쓸 때 가장 편한 건 연필이다. 스치는대로 휙휙 적히는 볼펜도, 특유의 필기감이 느껴지는 만년필도 좋지만, 역시 연필만큼 마음 가는대로 글을 쓰게 해주는 건 없다. 연필심 특유의 종이에 걸리는 느낌이 글 쓰는 중간 중간 잠시 생각에 틈을 준다. 연필과 같은 허세의 느낌으로 스테들러 연필깎이도 샀는데, 어느정도 쓰고 뭉뚝해진 연필을 깎을 때마다 희열을 느낄 때가 있다. 벼...변태란 말은 아니고 줄어든 연필만큼 종이에 생각의 흔적을 남겼다는 게 눈에 보이기 떄문이다.(이게 또 잉크 양이 줄어드는 거랑 다르게 느껴진다)



이렇게 깜찍한 물건도 있더랬다. 열필깍지라고 해서 급하게 샀는데... 속았다. 2년간 오레오만 썼는데 이참에 좀 바꿔볼까.



진짜 허세의 상징, 스테들러 연필깎이



  연필 얘기를 했으니 곁다리로 샤프도 살짝 말해본다. 사실 샤프는 뭐라 할 말이 없다. 학창 시절에는 굴러다니는 아무 샤프나 썼기 때문이다. 학생 샤프의 가장 기본인 검정색 샤프(브랜드조차 기억나지 않는다)는 가격도 싸서 웬만하면 바꿀 일이 없었다. 대학교에 들어와서까지 비슷한 종류를 썼으니 말 다했다.


  샤프를 바꾼 건 딱 한번이다. 막 전역을 하고서 막 허세를 부리기 시작하면서. 역시 필기는 펜보다 샤프지! 하며 일본제 샤프를 샀다. 여태껏 쓰던 샤프는 심이 0.5mm였는데, 이놈은 0.7이었다. 한참 필기구를 다루는 블로그를 들락거렸는데, 거기서 소개한 굵은 샤프심은 되게 달라보이고 멋있어보였...다기보다 그냥 허세를 채우기 위한 도구였 듯싶다. 오래 쓰고자 샤프심도 세 통이나 샀다. 겉에 가격이 200이라고 써 있길래 보통 샤프심과 다르진 않네, 했지만 단위가 원이 아니라 엔이었다. 샤프심 세 통을 7천 원 넘게 주고 속은 듯한 느낌을 받으며 문구점을 나왔다. 물론 샤프와 샤프심은 1년이 채 가지 않아 잃어버렸다.


  대학교에 입학하면서 새로 관심을 둔 필기구는 만년필이었다. 모나미펜 같은 잉크펜이나 부드럽게 써지는 젤펜을 쓰는 건 뭔가 대학생답지 않아 보였다. 흰 종이에 사각거림과 함께 부드럽게 흘러나오는 잉크- 그렇다. 이 역시 허세였다. 허나 얇은 펜만을 써오던 나에게 두꺼운 닙을 가진 만년필들은 불편했다. 결국 세필로 유명한 일본의 세일러 에이스를 샀다. 사고서 한동안은 신나게 썼다. 일기나 생각없이 쓰는 글에 사용하기 딱 좋았다. 가끔 닙 방향이 잘못돼 글이 멈추면 생각할 여유가 생겨 좋았다. 그것도 잠시뿐, 대학생이 되어서 오히려 많아진 필기량에 만년필은 조금 쓰기 어려웠다. 결국 고등학생 때와 같이 하이테크를 썼다.


  그렇게 잊혀졌던 에이스를, 남자 인생에 가장 기억에 남고 의미 있는 시간이자 가장 잉여였던 기간인 군인 시절에 다시 손에 잡았다. 입대 전에는 사나흘 간격으로 기록을 남겼는데 입대 후에는 본격적으로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별 의미없는 일도 쓰고, 책을 읽고 간단한 감상도 끄적였다.(그때부터였을까요, 의미없고 허세넘치는 독후감을 쓰기 시작한 게) 부모님이 넣어주신 택배에 고이 담겨온 에이스를 1년 가까이 잘 썼건만, 상병 휴가를 나가서 망가뜨리고 말았다. 잉크가 잘 나오지 않아 만년필을 털다가 닙이 책상에 부딪혔다. 닙 앞쪽은 독수리 부리처럼 아래로 휘어버렸다.


  남은 군생활은 모나미와 함께 했고, 전역 후에는 세필이 아닌 두꺼운 만년필을 써보고자 싸구려 파카 벡터를 샀다. 두꺼운 닙에 적응하지 못하고 결국 에이스로 돌아왔다. 이번엔 에이스를 잃어버리고, 기본 중의 기본이라는 라미 사파리를 들였다. 사파리도 벡터만큼 두꺼워 적응하지 못했지만 투박한 벡터보다 훨씬 예쁘고 세련된 디자인이라 그럭저럭 쓸 만했다. 그럭저럭 1년을 버티다가 결국 다시 세필로 돌아왔다. 만년필의 맛을 잘 알지도 못하고 그런 것에 둔감할 게 뻔하기 때문에 싸고 가성비 좋은 입문용으로 버티기로 했다. 파일롯뜨 에르고그립. 투명한 색이어서 조금 지저분해 보이지만 막 쓰기에는 정말 좋은 놈이다. 그러고보니 여태까지 쓴 만년필들은 5만원이 넘지 않는다. 정말 좋은 만년필을 시필이라도 해보고 싶다. 워터맨에서 죽이는 게 하나 나왔다고 하던데, 검색해보니 70만원이다. 만년필에 이만큼을 낼 용기는 없다.


  에르고그립을 아무리 막 쓴다지만 불편할 때가 많다. 그럴 때 쓰라고 있는 게 볼펜이다. 학창시절에는 좀 비싸더라도 하이테크를 썼다.(하이테크인지 하이텤-씨인지 아직도 알 길이 없다) 당시에는 하이테크만큼 가는 심도 없었거니와 한 자루에 2천 원의 가격은, 비싼 펜을 쓰면 공부를 더 잘할 것 같은 근거 없는 자신감을 주었다. 연필과 마찬가지로 하이테크도 끝까지 쓰지 못했다. 연필은 뒤에 볼펜 깍지라도 씌워 닳도록 썼는데 하이테크는 결코 그러지 못했다. 첫째는 잉크가 꽤나 많아서였고, 둘째는 심이 워낙 얇아 살짝 떨어뜨리기만 해도 고장나는 경우가 더러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마다 나는 좋아하며 새 펜을 샀다.


대학생 때는 예쁜고 보기 좋은 필기보다 빠르면서도 정확한 필기가 필요했다. 이런 필기에는 젤펜보다 잉크펜이 어울리리란 판단에 괜찮은 펜을 찾아 하이에나처럼- 돌아다녔다. 그렇게 발견한 놈이 BIC의 주황색 볼펜이다. 잉크펜의 대명사는 모나미다. 모나미는 싸고 편하지만 잉크똥이 어마어마하게 생겨 노트필기를 망치는 때가 더러 있다. 그에 반해 BIC 볼펜은 똥이 상대적으로 적었다. 필기감은 모나미보다 좋고 잉크 흐름도 나쁘지 않다. BIC 볼펜은 한번 살 때마다 세 자루씩 사왔고 가격도 싸 잃어버려도 부담이 적었다. 덕분에 그 많던 주황색 볼펜이 필통에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한동안 만년필을 쓰다 색다른 볼펜이 눈에 들어왔다. 알라딘에서 문학동네 이벤트를 열었는데 문학동세 세계문학을 사면서 추가금을 내면 헤밍웨이 글씨가 프린트된 모나미 153 NEO를 주었다. 이벤트라면 사족을 못 쓰는데다 볼펜이라니! 모나미에서 이런 볼펜을 발매한지도 몰랐다. 볼펜에 혹해 분명 사놓고 책장에 계속 꽂아둘 책 하나를 골랐다. 펜은 묵직하고 모양도 마음에 들었다. 젤펜에 가까울 정도로 매끈한 필기감에 깜짝 놀랐지만 곧 노트 전체에 퍼진 악성종양 같은 볼펜 똥에 매우매우매우매우매우 실망했다. 결국 장식용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 좋다던 파카 조터도 함께 들였으나 기대보다 필기감이 좋지 않아 잘 쓰지 않는다.



넌 나에게 똥을 줬어



알라딘 이벤트는 정말 매력적이어서 쓰잘데기 없는 물건도 사게 만든다. 위는 문학동네 필립 로스 펜홀더.



  양이 적지만 필기구를 이만큼 썼으니 예의상 노트를 쓸 때가 되었다. 가장 좋아하는 노트는 대학교 들어와서 쓴 첫 일기장이다. 대학 입학부터 군입대 전까지 천천히 쓰던 노트다. 커버가 잘 휘어지는 플라스틱이었고, 종이 질도 좋아 어떤 필기구로 쓰나 만족스러웠다. 만년필 잉크를 잘 받지 못하는 종이가 많은데 이 노트는 쓰는대로 쪽쪽 잘 받아먹었다. 군 시절에 두번째 노트로 하드커버를 선택했으나 딱딱한 촉감에 머리가 굳고 부담감이 밀려와서 실패. 그뒤로 서너권의 노트를 사봤지만 허사였다.


  좋은 노트를 알아보던 중 허세 부리기의 끝판왕, 몰스킨을 알게 되었다. 몰스킨이 허세라는 말이 아니다. 이 노트를 잘 쓰는 사람은 일정 관리, 글쓰기, 그림 그리기 같은 여러 일을 잘 한다. 분명 몰스킨이 아니라 싸구려 노트로도 잘 해낼 것이다. 나는 몰스킨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으니 결국 허세에 취해 산 것이 된다. 첫 몰스킨은 대학교 졸업반 때 산 소프트커버 포켓 사이즈 데일리다. 학교생활을 하며 매일 해야 할 과제를 적었다. 첫 몰스킨은 그나마 잘 사용했지만 두번째 구입은 거기에 더 허세를 더해 하드커버 라지사이즈 룰드를 산다. 일기장 목적으로 샀는데 결국 3개월을 못 채우고 때려치웠다. 하드커버란 하찮은 이유로.


  지금은 소프트커버 라지사이즈 플레인을 쓴다. 줄이 없는 백지인데 생각없이 쓰는데는 빈 종이도 괜찮다. 허나 다음에 살 땐 반드시 하드커버를 살 것이다. 몰스킨이 아닌 일반 스프링노트도 괜찮을 것 같다. 글씨를 못 쓰기 때문이다. 가운데가 찝힌 노트에 글을 쓰면 아무래도 글씨 쓰기가 불편하다. 그리고 사실, 몰스킨 종이질도 그닥 좋은 것 같진 않다. 파카 퀑크 잉크를 사용하는데 상당히 연함에도 종이 뒤에 너무 비치는 느낌이다.



지금 가진 몰스킨 노트. 좌측부터 독서기록장, 안 쓰는 하드커버, 소프트커버



  너무 연관성 없이 소재가 바뀌는데, 그런 건 차치하고 마지막은 포스트잇이다. 공부를 잘하던 친구들은 고등학교 때부터 포스트잇을 활용했는데 나는 대학을 마칠 때까지 그러지 않았다. 중요한 내용은 미리 요약본을 만드는 습관이 있어서 페이지를 골라 책을 펼 일이 많지 않았다. 포스트잇을 사용하기 시작한 때는 본격적으로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쓰면서부터다. 책을 읽고 독후감에 그럴듯한 문구는 남기고픈데 책을 접거나 종이에 낙서하기는 마음이 편치 않아 포스트잇을 사용했다. 처음에는 노랑 파랑 빨강 등의 보통의 포스트잇이었는데, 요즘엔 끝에만 색이 들어간 투명 포스트잇(포스트잇 플래그)을 쓴다. 이걸 살 때도 문제가 있었다. 2년 전에 문구점에서 5색 플래그 10세트 든 두툼한 플래그 통을 발견했다. 포스트잇이 얼마나 하겠어, 하고 계산대에 가져갔다가 8만원이라는 말에 기겁했다. 결국엔 이걸 다 쓸 거니까, 하며 사왔는데 이제 두 세트를 썼다. (사실 한 세트는 쓰다가 잃어버림) 한 10년은 쓸 기세다.



재앙의 시작



  문구는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방향이 바뀌고 있다. 손글씨를 쓰는 건 특별한 일이다. 사랑하고 고마운 이에게 (상대적으로) 많은 시간을 들여 손편지를 쓰거나, 힐링을 한다고 좋은 글귀를 필사한다. 간단한 메모는 이미 스마트폰이 가져갔다. 자판을 두드려 입력할 수도, 목소리를 남길 수도 있다. 문구는 이렇게 사멸해가는가?


  절대 아니다. 문구의 디지털화는 전자책과 비슷하다. 미래학자들은 디지털이 아날로그를 잡아먹으리라 점쳤다. 아날로그가 디지털로 진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것들이 사라졌는가? 비중이 줄었어도 여전히 남아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문구의 디지털화는 아날로그의 완벽한 대체가 아닌 또 다른 방식일 뿐이다. 에버노트를 못 쓴다고, 메모앱을 잘 활용하지 못한다고 자신을 탓하지 않아도 된다. 현대의 흐름을 지나치게 따라가려는 강박은 버려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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