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한국 소설은 쉬이 손이 가지 않는다. 특유의 우울함 때문이다. 뭐만 하면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일인양 세상을 비관하기 일쑤다. 개중에 서사에 힘이 없는 작품은 정말 정이 가지 않는다. 한국 문단 특유의 순수문학을 향한 집념이 싫었다. 무슨무슨 문학상 수상작을 보면 이런 경우가 더러 있었다. 덧붙여 문장이 좋다고 꼽히는 작가도 잘 읽지 않았는데, 문장의 정갈함을 가꾸는 데 너무 치중한 나머지 그것만이 장점으로 보이는 이가 여럿 있기 때문이었다.


은희경도 그런 이미지였다. 내 비루한 독서력을 가리고자 하는 변명 같지만 말이다. 전에 <소년을 위로해줘>를 얼마 읽지 못하고 바로 덮어버렸다. 그래서 이번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는 첫 페이지를 넘기기가 정말 힘들었다. 은.희.경. 작가 이름 세 글자가 주는 압박감이 너무 컸다. 게다가 20년 된 작품이라니, 너무 오래된 작품 아닌가.


그래도 읽어야겠지. 목욕재계를 하고 조용한 도서관에서 책을 읽었다. 책을 읽으면서 여태까지 가졌던 은희경의 이름이 주는 무게감이 완벽한 오해였음을 깨달았다. ‘은희경 = 문장’이라는 등식이 머리에 가득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물론 어른의 사랑(…)이 소재가 흥미로워 더 잘 읽은 면도 있지만.


주인공 강진희는 애인을 여럿 둔다. 하나는 당연한 비극이 예정되어 있고, 둘은 그중 하나를 선택하면 그때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이유로 세 명의 애인을 선호한다. 애인이 셋 정도는 되어야 사랑에 대한 냉소를 유지할 수 있다고 말하는 그에게, 사랑은 상대에게 목매다는 일이 아니다.


그녀가 여러 명의 애인을 만나는 건 단순히 바람둥이인 까닭은 아니다. 외로워서도 아니다. 그녀에게 애인은 외로움의 해소와 아무 관계가 없다. 애인 관계란 미래에 대한 부담이 없고 언제라도 원할 때에 자기의 감정을 철회할 수 있는 매력적인 관계다. 일대 일로 맺는 사랑의 감정이 때로는, 아니 대개 서로에게 폭력이 되고는 한다. 상대를 소유하고 통제하려는 순간 관계는 사랑이 아니라 서로를 독차지하고픈 욕망으로 전락하고 만다.


진희와 관계를 맺는 세 명의 남자는 그녀가 사랑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뚜렷이 나타낸다. 상현은 과거에 결혼했지만 상처만 가득 준 인물이다. 그녀가 사랑에 대한 신뢰를 잃는 순간이었다. 진희가 가진 여러 명의 애인은 상현이 만든 상처를 덮기 위한 미봉책이다. 현석은 현재 진희가 가장 사랑에 가까운 감정을 느끼는 인물이다. 진희는 현석과 만날 때 가장 진지해진다. 하지만 현석이 청혼을 하자 그녀는 거절한다. 현석과의 관계를 무겁게 하지 않기 위해서다. 마지막으로 종태와의 관계는 즐거움과 가벼움이 공존한다. 여기에 진지함이란 없다. 가장 유희적인 관계라고 할까. 과거의 상처를 감추기 위해 유희만이 가득한 가벼운 관계다. 종태가 사랑한다 말하는 것은 단 한순간도 진지하게 들리지 않는다.


서로와의 관계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지는 것은 사랑할 때 누구나 겪는 자기최면이라고 끝까지 주장하는 진희는 어떤 사랑으로 그 끝을 맺을까. 후반부에 진희는 사랑을 얻기 위해 한숨짓고, 얻은 다음에는 믿지 못해 조바심을 내고, 결국에는 그것을 잃어버릴까봐 스스로 피폐해지는 과민한 기질을 가진 것 같다고 고백한다. 그렇다고 진희가 불쌍한 인물인가? 글쎄, 행복과 불행은 타자의 위치에서 판단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단순히 이야기를 들었다고 행불행을 가를 수 없다.


은희경은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라는 가사로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서로가 마지막 사랑이라는 확신을 할 수 없으니, 지금의 상대와 춤을 즐기는 것이 마지막 춤을 추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사랑하는 그 순간을 즐기면 언젠가 빛나리라. 보편적인 문장이면서도 진희의 과거와 사랑 방식이 엮이면서 복합적인 이야기가 되었다. 매력적인 작품이다.

댓글
댓글쓰기 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