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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이야기/독서 노트

바깥은 여름 - 김애란 (문학동네, 2017)

by 양손잡이™ 2018. 6. 17.

책을 읽고 아무 영양가 없는 잡담을 해봅시다.


1. 작년에 '소설가들이 꼽은 2017년 최고의 소설'이라는 수식어를 단 <바깥은 여름>(이하 여름)을 한 해 건너 드디어 읽었다. 여름이라는 화사한 계절, 그에 어울리는 파란색의 예쁜 표지까지, 작가의 전작 <두근두근 내 인생>(이하 내 인생)에 비추어보면 통통 튀는 소설일 것 같은데 막상 책을 읽은 사람들은 우울의 끝판왕이라고 한다. 그러니 어찌 기대를 안할 수 있겠어?


2. 많은 이들에게 찬사를 받고 많이 읽히는 김애란 작가지만, 아직 그의 작품을 2편밖에 읽지 않고 평가도 극을 달린다. 첫 작품집 <달려아, 아비>는 재밌게 읽었는데 김애란을 일약 베스트셀러 작가로 만들어준 <내 인생>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게다가 2013 이상문학상 수상작 단편 '침묵의 미래'는 정말... 당시에는 최악이었다. 2012년 수상작들은 다들 좋아서 기대하며 읽었건만, 내게 '침묵의 미래'는 관념소설이라는 생각만 들게 했다.


3. 1호 2불호. 덕분에 그 좋다던 <비행운>도, <침이 고인다>도 모두 책만 사놓고 손도 안댔다. 사실 <여름>도 순위권에 없다가 어쩔 수 없이 읽어야 하는 처지에 놓여서 펴게 되었다. 뭐, 덕분에 좋은 책 읽었다. 다른 사람들이 극찬했을 때 읽었으면 함께 이야기하고 많은 의견을 나눴을텐데 조금 아쉽다. 부족한 내 안목을 탓하는 수밖에 없겠지.


4. 흠, 그런데 첫 작품 '입동'을 읽는데 어디서 읽은 느낌이다. 두번째 '노찬성과 에반'... 어라 이것도? '침묵의 미래'야 이상문학상 수상집에서 읽었다지만 다섯번째 작품 '풍경의 쓸모'도 익숙하다. 작년에 이 책을 읽었던가? 아무리 기억을 떠올려봐도 이 책을 편 일이 없는데? 책 가장 뒷편에 작품 발표 지면을 보니 알겠다. 창비와 릿터, 현대문학 잡지에서 읽었구나. 나도 저 당시에는(2014년) 충실히 살았구나, 새삼 내가 낯설어진다.


5. 대부분의 일반문학이 그러듯, <여름> 안이 작품들은 모두 상실을 다룬다. 상실에 주는 공허와 슬픔, 그것을 수용하는 태도(수긍하거나, 부정하거나)를 보여준다. 절대 <내 인생>을 생각하며 읽으면 안되겠다. 물론 <내 인생>도 상실을 직접적으로 다루지만 <여름>보다 훨씬 긍정적인 에너지를 내뿜는다.


6. 몇 작품에 대한 간단히 소회를 나눠보자. '입동'은 한 부부가 갑작스럽게 아이를 잃은 이야기다. 부부는 이 슬픔을 견디다가 집안의 더러워진 벽을 새로 도배하기로 마음먹는다. 슬픔과 더러움 - 슬픔의 극복과 도배를 통한 깨끗함은 아주 단순하면서 명쾌한 대비다. 여기서 끝났다면 별거 아닌 글이 되었겠지만, 부부가 도배를 하다가 벽에 그려진 아이의 낙서를 보는 순간 조금 새로운 국면에 도달한다. 잘 보이지 않는 벽 아래편에 그려진 아이의 낙서처럼, 슬픔은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있으면서 지워지지 않는다. 새로운 도배지을 벽에 붙이듯이 슬픔은 덧씌워질뿐 우리의 기저에는 여전히 남아 있다.


7. 노찬성과 에반. 초등학생 찬성이 버려진 개(에반)을 키우는 이야기이다. '노찬성과 에반'에서는 상실의 슬픔을 아는 찬성의 할머니와 상실의 개념을 모르는 찬성의 대비가 눈에 띈다. 에반이 나이가 들어 시름시름 앓을 때, 찬성은 돈이 없어 치료를 해주지 못하고 안락사를 시키기 위해 알바를 하며 돈을 번다. 이 이야기를 듣고는 같이 알바일을 하는 중학생은 찬성을 또라이 취급을 한다. 그래, 보통의 관점이라면 에반을 치료해줘야겠지만, 찬성은 에반의 아픔에 진정으로 공감한 것은 아닐까? 에반을 위해 자신의 개념 안에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일을 해주려고 노력한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든다. 진정한 공감과 진정한 용서란 무엇일까라는 의문이 든다.


8. 침묵의 미래. 5년 전에 관념소설이라고 단정짓고 재미없다, 라고 평을 내렸는데... 지금 읽으니까 정말 좋다. '소수언어박물관'이라는 곳에서 사라져가는 언어를 보존하고 연구한다. 그 연구가 단순히 학술적이지 않고, 실제로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을 유리 안에 전시하고 관람객이 오면 자신의 언어로 연기하듯 인사하는 식이다. 단편의 화자는 이제 막 소멸된(?) 언어(??)로, 언어의 존재와 소멸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를 생각해 볼만하다. 이 단편에서도 대비가 빛을 발한다.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 천여 개의 언어지만 아이의 울음소리는 모든 인간이 단번에 이해할 수 있는 언어라는 뜻깊은 대비는, 같은 언어를 쓰지만 따로국밥처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마음 깊숙한 곳에는 연민과 공감이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을 환기시킨다. 5년 전에는 왜 이 작품을 그렇게 형편없다고 평했는지 모르겠다...


9.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세월호를 연상시키는 단편이다. 상실을 마주하는 태도를 너무나도 서글프게, 동시에 연민 있게 그린다. 학생을 위해 목숨을 바친 남편을 그리워하는 화자(아내)는 계속해서 딱지가 생기는 생채기에 괴로워한다. 주변 사람들은 남편을 애도하고 학생을 원망한다. 이 사람들 사이에서 학생의 누나가 쓴 편지를 읽고서 화자는 울면서 남편의 용기와 희생에 끝내 눈물을 흘린다. 단편 안에서 아내는 주로 시리에게 질문을 하는데, 시리와 편지는 같은 텍스트이면서도 상반된 메세지를 전한다. 전자는 짜여진 알고리즘에 의해 대답을 해 화자가 원하는 답변을 주지 않는다.(화자가 답 자체를 원하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반면 후자는 사람(학생이 누나)이 직접 써 진심과 공감이 담겨 있다. 시리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를, 편지는 사라지는 인간적인 정과 감정교감을 뜻한다고 하면, 우리 인간이 잃어가고, 끝까지 지켜내야 하는 가치는 무엇일까?


10. 단편 소설은 정말 어렵다. 장편에 비해 불친절하고 까딱 잘못 읽으면 작가가 숨겨놓은 의미를 놓치기 일쑤, 거기에 오해까지 더해지면 큰일이다. 그래서 모든 소설은 두 번 이상 읽어서 의미를 깊게 파악하고 싶은데 읽을 책은 많고 욕심은 크고 시간은 없으니 이정도로 만족...할리가 없잖아! 나도 더 똑똑해지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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