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파스칼 키냐르의 전작 <음악 혐오>는 읽기 꽤나 어려운 책이었다. 당시 책의 홍보문구를 보고 지적 허영심에 취해 샀는데, 문구는 이렇다.
‘음악 혐오’라는 표현은 음악을 그 무엇보다 사랑했더 니에게 그것이 얼마나 증오스러운 것이 될 수 있는지를 말하고자 한 것이다.
공쿠르 상 수상 작가인 파스칼 키냐르가 말하는 음악의 시원과 본질이라며. 음악이 잉태된 곳에 관한 깊은 밤의 몽상이라며. 아니었다. 이 책은 음악으로 시작해 문학, 역사, 철학, 그리고 대체 알 수 없는 짧은 문장으로 이루어진 에세이였다. 책을 읽기는 읽었으나, 내 머리에는 책 제목과 저자밖에 남지 않았다. 어떤 강렬한 인상과 함께.
2. 솔직히 말해볼까. 사실 이번에 읽은 책인 <파스칼 키냐르의 수사학>(이하 ‘수사학’)도 이해를 1도 못했다. 하나도 못한 게 아니라, 정말 1도 못했다. 전작에서 받은 강렬한 인상 때문에, 내 주제도 모르고 이 책을 고른 것이다. 문학과 말을 다룬다길래 냉큼 폈는데 웬걸, <음악 혐오>와 마찬가지다. 말로 시작해 문학, 역사, 철학, 그리고 대체 알 수 없는 짧은 문장으로 이루어진 에세이다.
3. 위키피디아는 수사학을 설득의 수단으로 문장과 언어의 사용법, 특히 대중 연설의 기술을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말한다. 흔히들 대중연설과 언어적 레토릭이라고 알고 있다. 하지만 ‘키냐르의 수사학’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책에서 수사학을 단순히 말의 기술이라고 칭할리는 없다.
저자는 언어의 의미를 여러 갈래로 말한다. 단순히 수사학을 설명하기도 하고, 언어-기호-세계로 이뤄지는 여러 관계를 말한다. 하지만 문학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언어와 문학 작품의 미학적 가치를 말하는 부분에 눈이 갔다.
문학인은 자신을 언어 체계와 동일시하지 말아야 하고, 특유의 지방어와도 동일시하지 말아야 하며, 발아 상태의 언어, 태초 종자, 문자, 언어의 문자적 실체, 문학적인 사물과 동일시해야 한다. _30쪽
위대한 시인이나 위대한 산문 작가는 몰아지경의 말을 찾는다. 절정에 이른 언어는 thauma(놀람, 감탄)와 ekstasis(황홀)를 뒤흔들고, 생각에 빛의 감각을 안긴다. _49쪽
소설은 언어로 만들어진 세상이 아닌 다른 무엇을 담는다. _129쪽
소설과 에세이를 읽다보면 정말 헉, 하는 부분이 종종 있다. 장면을 세세히 그려내겠다는 의지로 묘사로 똘똘 뭉친 문장. 작품 속 인물, 배경, 그리고 독자인 나까지 한번에 꿰뚫는 통찰력 있는 문장. 뾰족하지 않지만 세심하게 말을 건내고 나를 감싸주는 문장. 이런 글을 읽을 때마다 내가 평소에 쓰는 일기는 무엇인가, 싶다. 오스카 와일드는 자기 일기만큼 재밌는 글이 없다고 하는데 말이다.
4. 거진 2주를 읽었지만, 언어와 문장을 섬세하게 다루어야 한다는 부분 말고는 기억에 남는 게 거의 없다. 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이해하지 못한 채 읽기를 끝냈는데 뒤늦게 말로 표현하기 힘든 울림이 느껴지더라는 독자가 있다는데(11쪽), 아쉽게도 나는 이 부류에 들어가지는 못했다. 사실 이 책을 그만 읽고 싶을 때도 많았으나 한글자 한글자 우겨넣듯이 읽었다.
이해하지 못한 채 읽기를 끝냈는데 뒤늦게 말로 표현하기 힘든 울림이 느껴지더라는 독자도 있고, 간혹 독서를 도중에 포기하는 독자도 보인다. 우리는 대개 길을 잃을까 겁낸다. 도로에서건 독서에서건 기를 써서 길을 잃지 않으려 든다. 리베카 솔닛은 <길 잃기 안내서>에서 길을 잃는 건 우리가 모르던 것을 발견하는 방법이라고 역설적으로 말한다. 우리가 길 잃기를 겁내지만 않는다며, 모든 걸 파악하고 출구를 찾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내려놓고 거닌다면 미궁도 평온한 산책로가 될 수 있다. _11쪽
책 안에서 뱅뱅 도는 2주였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공부하듯 연필을 들고 줄을 치고 종이를 접으며 열심히 읽었다. 다소 쉬운 책을 선호해서 책 안에서 길 잃기에 익숙하지 않다. 보통 책을 포기하고 말지. 하지만 이번에는 끈질기게 읽어봤다. 불가해한 부분이 대부분이었지만, 그 안에서도 노트에 옮겨 적고 싶은 문장을 꽤 건졌다. 좀 더 정진하고, 다시 읽어봐야겠다. 한번 길 잃어봤으니, 이번에는 해매도 즐길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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