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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이야기/독서 노트

파스칼 키냐르의 수사학 - 파스칼 키냐르 (을유문화사, 2023)

by 양손잡이™ 2023. 3. 23.

1. 파스칼 키냐르의 전작 <음악 혐오>는 읽기 꽤나 어려운 책이었다. 당시 책의 홍보문구를 보고 지적 허영심에 취해 샀는데, 문구는 이렇다.

 

‘음악 혐오’라는 표현은 음악을 그 무엇보다 사랑했더 니에게 그것이 얼마나 증오스러운 것이 될 수 있는지를 말하고자 한 것이다.

 

공쿠르 상 수상 작가인 파스칼 키냐르가 말하는 음악의 시원과 본질이라며. 음악이 잉태된 곳에 관한 깊은 밤의 몽상이라며. 아니었다. 이 책은 음악으로 시작해 문학, 역사, 철학, 그리고 대체 알 수 없는 짧은 문장으로 이루어진 에세이였다. 책을 읽기는 읽었으나, 내 머리에는 책 제목과 저자밖에 남지 않았다. 어떤 강렬한 인상과 함께.

 

 

2. 솔직히 말해볼까. 사실 이번에 읽은 책인 <파스칼 키냐르의 수사학>(이하 ‘수사학’)도 이해를 1도 못했다. 하나도 못한 게 아니라, 정말 1도 못했다. 전작에서 받은 강렬한 인상 때문에, 내 주제도 모르고 이 책을 고른 것이다. 문학과 말을 다룬다길래 냉큼 폈는데 웬걸, <음악 혐오>와 마찬가지다. 말로 시작해 문학, 역사, 철학, 그리고 대체 알 수 없는 짧은 문장으로 이루어진 에세이다.

 

 

3. 위키피디아는 수사학을 설득의 수단으로 문장과 언어의 사용법, 특히 대중 연설의 기술을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말한다. 흔히들 대중연설과 언어적 레토릭이라고 알고 있다. 하지만 ‘키냐르의 수사학’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책에서 수사학을 단순히 말의 기술이라고 칭할리는 없다.

 

저자는 언어의 의미를 여러 갈래로 말한다. 단순히 수사학을 설명하기도 하고, 언어-기호-세계로 이뤄지는 여러 관계를 말한다. 하지만 문학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언어와 문학 작품의 미학적 가치를 말하는 부분에 눈이 갔다.

 

문학인은 자신을 언어 체계와 동일시하지 말아야 하고, 특유의 지방어와도 동일시하지 말아야 하며, 발아 상태의 언어, 태초 종자, 문자, 언어의 문자적 실체, 문학적인 사물과 동일시해야 한다.  _30쪽

 

위대한 시인이나 위대한 산문 작가는 몰아지경의 말을 찾는다. 절정에 이른 언어는 thauma(놀람, 감탄)와 ekstasis(황홀)를 뒤흔들고, 생각에 빛의 감각을 안긴다.  _49쪽

 

소설은 언어로 만들어진 세상이 아닌 다른 무엇을 담는다.  _129쪽

 

소설과 에세이를 읽다보면 정말 헉, 하는 부분이 종종 있다. 장면을 세세히 그려내겠다는 의지로 묘사로 똘똘 뭉친 문장. 작품 속 인물, 배경, 그리고 독자인 나까지 한번에 꿰뚫는 통찰력 있는 문장. 뾰족하지 않지만 세심하게 말을 건내고 나를 감싸주는 문장. 이런 글을 읽을 때마다 내가 평소에 쓰는 일기는 무엇인가, 싶다. 오스카 와일드는 자기 일기만큼 재밌는 글이 없다고 하는데 말이다.

 

 

4. 거진 2주를 읽었지만, 언어와 문장을 섬세하게 다루어야 한다는 부분 말고는 기억에 남는 게 거의 없다. 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이해하지 못한 채 읽기를 끝냈는데 뒤늦게 말로 표현하기 힘든 울림이 느껴지더라는 독자가 있다는데(11쪽), 아쉽게도 나는 이 부류에 들어가지는 못했다. 사실 이 책을 그만 읽고 싶을 때도 많았으나 한글자 한글자 우겨넣듯이 읽었다. 

 

이해하지 못한 채 읽기를 끝냈는데 뒤늦게 말로 표현하기 힘든 울림이 느껴지더라는 독자도 있고, 간혹 독서를 도중에 포기하는 독자도 보인다. 우리는 대개 길을 잃을까 겁낸다. 도로에서건 독서에서건 기를 써서 길을 잃지 않으려 든다. 리베카 솔닛은 <길 잃기 안내서>에서 길을 잃는 건 우리가 모르던 것을 발견하는 방법이라고 역설적으로 말한다. 우리가 길 잃기를 겁내지만 않는다며, 모든 걸 파악하고 출구를 찾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내려놓고 거닌다면 미궁도 평온한 산책로가 될 수 있다.  _11쪽

 

책 안에서 뱅뱅 도는 2주였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공부하듯 연필을 들고 줄을 치고 종이를 접으며 열심히 읽었다. 다소 쉬운 책을 선호해서 책 안에서 길 잃기에 익숙하지 않다. 보통 책을 포기하고 말지. 하지만 이번에는 끈질기게 읽어봤다. 불가해한 부분이 대부분이었지만, 그 안에서도 노트에 옮겨 적고 싶은 문장을 꽤 건졌다. 좀 더 정진하고, 다시 읽어봐야겠다. 한번 길 잃어봤으니, 이번에는 해매도 즐길 수 있을 것 같다.

 

 
파스칼 키냐르의 수사학
『파스칼 키냐르의 수사학』은 그간 자신만의 독보적인 문학 세계를 창조해 온 키냐르가 펼치는 문학론이다. “사색적 수사학”이라는 원제를 단 이번 책은 키냐르가 본격적으로 ‘문학이란 무엇인지’ 혹은 ‘문학적인 글쓰기’에 대해 사색하는 책이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이번 작품 역시 키냐르답다. 독자에게 쉽게 길을 내어 주기는커녕, 독자를 점점 더 안갯속으로 이끈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불빛이 거기 있다. 『파스칼 키냐르의 수사학』에서 저자는 역사 속 잊힌 인물, 잊힌 언어, 잊힌 전통의 기원을 탐색한다. 이렇듯 ‘잊힘으로써’ 문학에 가해진 폭력은 키냐르의 글쓰기로 조용한 회복의 시간을 맞이한다. 잊힌 전통을 되새김으로써 문학을 이야기하다 『파스칼 키냐르의 수사학』은 그간 자신만의 독보적인 문학 세계를 창조해 온 키냐르가 펼치는 문학론이다. 경계 없는 글쓰기를 해 온 저자는 여러 작품을 통해, 때로는 소설 속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때로는 자신만의 목소리로 말과 언어에 대해, 글쓰기에 대해 독창적인 사고를 전개한 바 있다. “사색적 수사학”이라는 원제를 단 이번 책은 키냐르가 본격적으로 ‘문학이란 무엇인지’ 혹은 ‘문학적인 글쓰기’에 대해 사색하는 책이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이번 책 역시 키냐르답다. 독자에게 쉽게 길을 내어 주기는커녕, 독자를 점점 더 안갯속으로 이끈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불빛이 거기 있다. 키냐르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이 세상에는 안내가 없으니 언어의 부재하는 별을 단호히 따라가야 한다”고. 이 책에서 키냐르는 철학자의 글쓰기와 작가의 글쓰기로 나뉘기 시작한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현자들이 남긴 글들을 재해석하며, 철학자의 글쓰기에 경도된 서구 문명이 놓치고 있는 감수성의 세계를 재발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논리와 논증에 기반한 철학적인 글쓰기를 단호하게 반박하는 동시에 이미지에 기반한 문학적 글쓰기를 예찬한다. 고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엄청난 독서 이력이 녹아 있는 이번 책에서 키냐르는 역사 속 잊힌 인물, 잊힌 언어, 잊힌 전통의 기원을 탐색한다. 이렇듯 ‘잊힘으로써’ 문학에 가해진 폭력은 키냐르의 글쓰기로 조용한 회복의 시간을 맞이한다. 이미지는 곧 생명, 이미지 없는 문학은 검에 낀 녹에 불과할 뿐 키냐르는 역사의 먼지 더미 아래 부당하게 묻힌 여러 인물을 건져 올린다. 백과사전 속 “공허하고 어리석은 주장을 펼친 수사학자”로 명시된 1세기 로마의 수사학자 마르쿠스 코르넬리우스 프론토는 저자에 의해 새롭게 조명된다. 키냐르에 따르면 프론토는 철학에 의연히 맞서 온 문학 전통이 존재했음을 증언한 최초의 인물이며, 고대 로마의 사상가들 가운데 “가장 독창적이고 가장 심오한” 인물이었다. 그는 다름 아닌, 『명상록』의 저자로도 유명한 2세기 로마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수사학 스승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명상록』은 과연 어떤 책인가. 이 역시 키냐르에 따르면 “생명 유지에 필수적이고 사색적이며 연상적인 이미지의 모음집”이다. 생명과 이미지가 연결되는 까닭은 이미지들에 지배당하는 눈의 운동과 발기가 우리의 운명이기 때문이다. “이미지들을 제시하는 언어가 발기한 가운데 흥분을 유발하고 활기를 띠고 커져서 배가되는 환각적인 이미지들의 몽환적이고 확실한 진전이 없다면 소설은 없다”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키냐르가 철학적 글쓰기를 비판하는 걸 넘어 거부하는 까닭은 철학자의 글쓰기에는 “기대 너머에서 불현듯 등장해서 독자나 청중을 후려치는” “예상 밖의, 뜻밖의 낱말”이 없기 때문이다. 문학은 자고로 듣는 이를 ‘설득’이 아닌 ‘열광’으로 이끌어야 하며, 위대한 시인이나 산문 작가가 몰아지경의 말을 찾는 것 역시 이 때문이라는 게 키냐르의 설명이다. 또한 철학은 기본 수사학의 한 지류일 뿐인데도 철학자들의 담론은 기를 쓰고 이미지들을 멀리한다고 지적한다. 저자는 프론토의 말 혹은 이미지를 빌려 철학은 “검에 낀 녹”에 불과하며 “언어와의 전투에서 매일매일 검의 녹을 벗겨 눈부시게 반짝이도록 닦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키냐르 글쓰기의 정수를 확인할 수 있는 책 이 책에는 프론토에 대한 글 외에도 다섯 개의 글이 더 실려 있다. 이들은 모두 ‘소론’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으며 ‘소론’이라는 이 독특한 글쓰기는 파스칼 키냐르를 특징짓는 파편적 형태의 글쓰기다. 자신의 『소론집』에 대해 쓴 소론(‘『소론집』에 관한 미세한 소론’)에서는 자기 자신을 특징짓는 이러한 글쓰기를 “나의 집”, “나의 이름”이라고 부르며 특별한 지위를 부여한다. 비록 그것이 유행에 뒤지고 고독할지언정, 나를 규정하는 제2의 자아라는 선언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만큼 이 작품은 키냐르 글쓰기의 정수를 확인할 수 있는 책이며, 키냐르식 글쓰기의 근원, 더 나아가 문학적 글쓰기의 시작을 짐작해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 같은 책이다. 우리는 언어에 기댄 삶을 산다. 그만큼 언어가 절대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생각하지만, 그러는 와중에도 소통이 불가능한 상황은 발생하기 마련이고, 오해와 불신의 씨앗이 발아하기도 한다. 우리를 구성하는 언어란 무엇인가. 문학을 이루는 언어란 무엇인가. 언어와 말, 글쓰기에 대한 사색의 끈을 놓지 않는 키냐르의 이번 책은 미로 같은 말들 속을 헤매는 독자에게 하나의 “부재하는 별”이 될 수 있을까.
저자
파스칼 키냐르
출판
을유문화사
출판일
2023.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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