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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이야기/독서 노트

이지 드로잉 노트 - 김충원

by 양손잡이™ 2012. 5. 12.
이지 드로잉 노트 - 9점
김충원 지음/진선북스(진선출판사)



049.


  나에게 그림이란 정말 넘을 수 없는 벽과 같은 존재이다. 초중고 시절, 음악과 체육은 정말 재밌었다. 예체능을 제외한 과목 성적도 꽤나 높은 편이어서 예체능까지 섭렵한 모범생 이미지였다. 단지, 미술시간만큼은 나에게 쥐약이었다. 시험이 문제가 아니었다. 항상 실기가 문제였다. 친구들은 '어떻게든 되겠지' 하면서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리고, 찰흙을 조물딱거리면서 재밌게 수업을 들었지만 나는 그 '어떻게든'을 도무지 용납할 수 없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어떤 분야든 일정 수준 이상 도달하지 못하면 자존심이 몹시 상한다. 하지만 내 머리 위의 벽을 깰 자신이 도무지 생기지 않는다면 포기하는 게 가장 편하다는 걸 알고 말았다. 사과 데셍을 하던 목탄을 조용히 책상에 내려놓은 후, 그림은 나와 영 친해질 수 없는 놈이었다.


  몇주 전 회사 교육 중에 그림을 그릴 일이 있었다. 동기는 나에게 간단한 그림을 그려달라고 부탁했고 나는 분명 말했다. 나는 선도 제대로 그을 줄 모르니 잘 못그려도 너무 타박하지 말라고 말이다. 동기는 그러마 하고 일을 맡겼고, 팀에 조금이라도 힘을 보태고자 떨리는 손으로 정성들여 선을 하나하나 천천히 그었다. 나름 뿌듯한 마음으로 그림을 동기에게 주었다. 그리고 보았다. 순간 흔들리는 동기의 눈동자를.


  이런 일도 있었다. 그림 그리기가 취미인 형이 내 캐리커쳐를 그려준 것이다. 나를 흘끗 보고는 선 몇개를 쓱쓱 긋더니 다 완성됐다며 내게 그림을 건냈다. 종이에 연필로 그린 그림도 아니었고 갤럭시노트와 S펜을 사용한 그림이었다. 간단한 그림이었는데 정말 내 특색을 120% 살린 그림이었다. 전체적인 얼굴 형상은 물론이고 두꺼운 안경 때문에 굴절돼 보이는 얼굴까지, 정말 보자마자 이게 나구나, 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그림이었다.


  이런 나라고 노력을 안한 건 아니다. 내 만화책을 가지고자 빌린 만화책을 그대로 배껴 그리기도 했고 이 책의 저자, 김충원씨의 책도 여러권 보면서 천천히 그리기도 했다. 캐릭터 그리기였나, 제목은 기억나지 않지만 손오공을 그리기도 했다. 동그라미를 그리고 그 안에 곡선을 채우면서 얼굴 방향을 맞추기도 했고 나만의 캐릭터도 만들어보려고 애썼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되지 않는 건 되지 않는 것이었다.


  솔직히 150여 쪽의 이 책을 보고 그림 실력이 일취월장할리는 없다. 아무리 재능보다 노력이라지만 그 짧은 시간 안에 멋진 그림을 그릴 수는 없다. 하지만 '이지'라는 말처럼, 참 쉽게 시작하는 책이다. 그 누구도 나에게 그림은 선부터 시작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고, 어떤 책도 선부터 연습시키는 책은 없었다. 조금 유치해보이지만 연필을 들고 선을 그려보았다. 직선도 삐뚜름하다. 선을 지그재그로 계속 그어보니 모양이 아주 더럽다. 직선도 이런한데 더욱 연습이 필요한 곡선은 어떠할까. 일정한 크기로 원을 그려야 하는데 점점 작아지고 모양도 제각각이다. 기본적인 선도 못그리니 캐릭터나 인물은 더 가관이었다. 뒤로 갈수록 그림은 엉망이 되었다. 26년간 좌절했는데 단 2주 동안 또 좌절했다. 이 쉬운 것조차 이렇게 엉망이라니.


  하지만 연필심이 닳는 걸 보는 재미가 있었다. 책에 이런 부분이 있다. 눈을 감고 연필 가는대로 선을 긋는 부분이다. 그저 연필이 종이에 닿는 촉감을 즐기라고, 저자가 말했다. 아직 그림 그리기를 포기하지 않았으니 가만히 눈을 감고 연필을 놀려보았다. 스윽스윽 하는 소리가 참 좋다. 연필심 가루 하나하나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아무 생각 없이 선을 그리고나니 양쪽이 검은색 선으로 가득했다. 연필심이 닳아 커터칼로 연필을 깎았다.


  과연 나도 그림을 잘 그릴 수 있을까. 꾸준히, 또 조금씩 노력하다보면- 내 친구들이 그림을 대했던 것처럼 어떻게든 될까. 하지만 연필을 잡고 글 대신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자신감 하나는 확실히 가질 수 있었다. 나만의 드로잉 노트를 가지고 열심히 그려보련다.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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