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 않는다는 말 - 김연수 지음/마음의숲 |
065.
내게 김연수라는 작가는, 아쉽게도 그다지 재미없는 이로 구분된다. 그의 소설은 단 한 편밖에 읽지 않았지만(<밤은 노래한다>) 다른 이들이 추켜세운만큼 재미를 느끼지 못했다. 김연수란 이는 산문이 더 재밌는 사람이다. 소설가란 직함을 달고 있기에 이런 말을 하기 참 미안하지만 말이다. 그걸 느끼게 해준 책은 <청춘의 문장들>이었다. 자신에게 다가왔고 머물러 있었으며 떠나간 것들을 노래했다. 자신이 읽었던 시를 빌려 참으로 맛깔스런 글을 토해냈다. 산문이란 장르의 묘미를 알려준 최초의 책이 되겠다. 추억을 그리며 조곤히 써내려간 문장이 너무 아름다웠고, 그건 이야기의 힘보다 강했다. 여운이 너무 깊어 책을 두 번 더 들췄다. 덕분에 책은 낙서장이 되었다.
<청춘의 문장들>에선 시와 문장을 이야기했다면 이번 <지지 않는다는 말>은 달리기를 소재로 한다. 달리기. 소설가라는 직업과 참 어울리지 않는 취미이다. 작가도 알고 있다. 아직도 달리냐는 질문을 받으면 난감하다고 한다. 뛴다고 하면 여전히 이상한 사람 취급이고 안 뛴다고 하면 역시나 네가 그렇지라는 시선을 받는단다. 하지만 글을 찬찬히 읽다보면 달리기는 소설가뿐 아니라 누구에게나 힘든 행동임을 알 수 있다. 매일 술마시고 담배 피며 연습하지 않다가 마라톤 대회에서 우승하는 달리기 천재는 없고,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42.195km가 주어진다. 심장이 터질 것 같고 허벅지가 찢어질 듯한 데서 오는 고통은 모두에게 넘어야 할 산이다. 순수하게 육체적인 고통을 넘어서야만 한다. 그러기에 달리기는 세상에서 가장 공평한 운동이란다.
아쉬운 것은 그토록 감명깊게 읽었던 <청춘의 문장들>보다 읽는 맛이 떨어진다는 점이다. 왜인지는 잘 모르겠다. 김연수의 산문집에서 바랐던 것은, 현재보다 과거였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한 편의 시, 하나의 문장을 곁들여 자신의 추억을 말했던 전작과 달리 이번 책은 유달리 현재를 많이 끌어다 쓴다. 어릴 적의 방황도 잘 보이지 않는다. 철없던 10대, 20대를 거쳐 이제 40대 어른이 된 김연수의 시선을, 나는 그리도 받아들이기 싫었나보다. 아직 잘 모르니까. 아직 크고 싶지 않으니까. 철없는 청년이고 싶으니까. 언제까지고 내게 공감해주고 나를 위로해주는 글귀만 찾고 싶으니까.
둘이서 어렸을 때 먹었던 아이스크림 이야기를 한참 떠들었다. 물론 보석바를 먹던 시절의 이야기도. 그때 나는 깨달았다. 추억을 만드는 데는 최소한 두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을. 혼자서 하는 일은 절대로 추억이 될 수 없다는 것을. (160쪽)
그건 아직, 나 혼자 있는 삶에 만족해서일지도 모르겠다. 여태 '우리'라는 단어에 익숙치 않다. 하고픈 일, 원하는 일, 만족하는 일, 그 모든 걸 하기에 시간이 부족하다. 다른 사람에게 신경쓸 겨를이 없다. 주변 누구에게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유유자적할 때가 많다. '우리'라 부를 만한 사람을 찾지 못했다고, 시간이 아깝다고 핑계만 댄다. 사실 겁이 난다. 만나는 사람이 누구든 새로운 인연은 무섭다. 그래서 하고 싶은 게 많다는 변명으로 나를 방어만 한다. 언제까지고 즐거운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하하호호 웃고 싶은 욕심. 어른이 될 준비를 하지 못했다는 방증일 것이다. 두려움에 떨며 계속해서 내 안으로 파고들기만 하고 소년은 계속 소년으로 남는다. 그래서, 이 자리에 머물러 있고픈 욕심에서, 나와 달리 저만치 가버린 김연수의 달리기가 조금은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나 싶다. 그런 면에서 항상 나에게 실망이 크다.
그중 내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건 지지 않는다는 말이 반드시 이긴다는 걸 뜻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깨달음이었다. 지지 않는다는 건 결승점까지 가면 내게 환호를 보낼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안다는 뜻이다. 아무도 이기지 않았건만, 나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았다. 그 깨달음이 내 인생을 바꿨다. (9쪽)
하지만 실망할 필요 전혀 없다. 어른으로의 변태과정이 남보다 조금 늦다고 결코 지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종종 인생을 마라톤에 비유하곤 한다. 그렇다. 그 긴 인생, 헥헥대며 달리는 마라톤과 같다. 그리고 모든 사람은 살면서 단 한 번 달리기를 한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남들보다 좋은 기록으로 들어오겠다는 것도, 몇 시간 안에 들어오겠다는 것도, 결코 중요하지 않다. 가장 중요한 것은 완주 그 자체이다. 아직 반환점 코빼기도 보지 못 했지만, 아직 앞으로 가고 있다. 방금 내 옆을 지나쳐간 친구를, 아직 한참 남은 마라톤 코스를, 앞으로 나올 내 기록을, 이 모든 걸 생각하고 두려워했지만 결코 그럴 필요가 없었다. 목표는, 그저 계속 앞을 향해 걸으며(혹은 뛰며) 결승 테잎을 끊는 것이다. 모든 이는 각자의 마라톤 코스를 뛰고 있기에 자신만의 결승 테입이 있고 타인과 비교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때로 착각하곤 한다. 코스라는 게 워낙 비슷해서 옆에 뛰는 사람이 모두 경쟁자처럼 보인다. 그러기에 조바심을 내고 이기려 죽어라 내달린다. 앞에 보이는 사람을 따라잡고 따라잡고 따라잡으려 한다. 분명 결승 테잎은 끊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을 얻었을까? 아무도 이기지는 않았다. 인생이란 마라톤은 절대 경쟁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기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다면 어떤 속도로 달려야 할까. 무던히 노력했는데, 그게 모두 무의미한 것이라고? 절대 그런 뜻은 아닐 것이다. 다만 조금은 달리기 그 자체를 느꼈으면 좋겠다. 팽팽해지는 장딴지, 찢어질 듯한 허벅지, 터질 것 같은 심장, 들숨 날숨으로 요동치는 콧구멍, 땀으로 젖은 피부. 모든 것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며 말이다. 그저 앞만 보지 말고 때론 옆을 보며 함께 달리는 사람과 인사하고 관중과 함께 웃고 그 뒤에 선 풍경을 즐기고 싶다. 나는 결코 늦은 게 아니라 조금 천천히 가고 있기에 난 지금을, 즐기련다. 나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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