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는 당당히 18세 이하 관람 불가 딱지를 붙이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영화 후반부 투형 장면은 26세인 내가 봐도 참, 거시기한 장면이다. 사실 이전의 영화들에선 더 잔인한 것도 많이 봐왔다. 내가 처음으로 다량의 피를 봤던 '배틀로얄'부터 봐도 이 영화와 비교하지 못할만큼 빨간색이 난무한다. 겨우 피 때문에 성인 관람 딱지를 줕이고 나오진 않은 듯싶다. 영화의 전체적 상황이 마지막 투형 장면에 대입되면서 오는 공포와 역겨움이 18세 관람가를 만든 주 장본인은 아니었을까. 심지어 성인 동반시에도 미성년은 이 영화를 볼 수 없다.
한 기자가 이란의 시골길을 지나며 영화는 시작한다. 기자의 차가 고장나 히치하이킹을 통해 가까운 마을에 들러 차를 수리한다. 외부인을 맞이한 시장과 물라는 과하다 싶을 만큼 친절을 베푼다. 그런 기자에게 조심스레 다가오는 한 여인이 있다. 그녀는 기자에게 이 마을엔 악마가 산다고 한다. 기자는 그 말을 흘려듣지만 결국 그녀와 마주 앉아 이야기를 듣게 된다. 순종적이었던 아내를 버리고 어린 소녀에게 새장가를 들기 위해 아내에게 간통죄의 누명을 씌운 후 투형을 집행시킨 무서운 진실. 영화는 이렇게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영화가 말하고 싶은 것은 과연 무엇인가. 표면적으로는 이란의 종교, 즉 이슬람교일까? 코란에 쓰인대로 사는 그들, 그리고 아직도 (내가 보기엔 너무나 비인도적인) 투형이 자행되고 있는 나라. 21세기가 10년도 더 지난 지금까지, 여성에게 히잡을 씌우는 그들의 전통을 아직도 이해할 수 없다. 다양성을 존중하라, 이런 말을 할 게 뻔하지. 그래, 전통은 고수할 수 있다 이거다. 다만 히잡에 가리워진 여자들의 피부만큼 그들의 인권마저 줄어들었다는 것이 큰 문제가 아닐까 싶다. 물론 이는 내가 이슬람교에 대해 거의 무지에 가까운 상태이기 때문에 '틀린' 견해일 수도 있다.
한 단계 더 들어가본다면 영화는 아직도 이 세상에 남아 있는 남성의 권위사상에 대해 말할른지도 모른다. 기자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녹음해달라고 하는 자흐라는, 이란에서는 여성의 말은 증거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건 비단 이슬람교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단지 힘이 세다는 이유로 여성 위에 군림하려는 남성이 판치는 세상이, 분명 존재한다. 그런데 재밌는 건, 영화에서 보듯이 모든 남성이 여성을 핍박하려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동시에 여성이 같은 여성의 고통을 보며 기뻐하기도 한다. 어떤 문화에서는 여성이 상위계급을 차지하는 나라도 있다. 이건 단순히 남성과 여성, 이분법적인 편가르기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남성/여성으로도 해석이 되지 않는다면 결국 종착점은 인간 그 자체가 될 것이다. 나는 이 영화가 참 역겨웠다. 위에서도 썼듯이 단순히 빨간색 피를 봐서가 아니다. 얼마 전에 보았던 영화 '프로메테우스'보다도 훨씬 그 느낌이 강했다. '프로메테우스'에는 끈끈한 점액질과 미지의 것에 대한 공포에서 오는 역겨움이 있었다. 반면 '더 스토닝'에는 눈앞에 확연히 보이기에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인간, 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뱃속에서 자라나는 에일리언보다도 더 이질감 느껴지는 인간에게 느껴지는 역겨움이 있다. 에일리언은 번식을 위해, 또 단순히 살육하는 본능을 위해 인간을 사냥한다. (아마 인간 외의 종족에게도 똑같이 하지 않을까) 반면 영화에서 우리 인간은? 이혼 위자료가 아까워 차라리 죽여버리잔 말이나 하는 사람이, 진짜 나와 같은 인간이 맞단 말인가? 그런 행동을 하고서 뻔뻔하게 앉아 있을 수 있다은 건, 참 흉물스럽다.
특히 불편했던 장면이 몇 있다. 투형이 확정되자 온 마을 사람들은 던질 돌을 찾는다. 여기에는 마을의 모든 남성 주민이 포함되고, 어린이들도 있다. 무서운 것은 아이들의 표정이 너무 신나보인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지금 누군가를 죽일 무기를 찾고 있다. 그런데 그들은 죄의식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 성악설을 논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단순히 순수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어릴 때부터 그렇게 자라온 이들이고 코란(물론 이 마을에선 그 의미가 조금 변질된 듯하다)에 충실하다. 그들은 무엇 잘못된지도 모른 채 그렇게 자랄 것이고, 또 같은 일이 일어날른지 모른다. 투형 시작 전, 한 버스가 도착한다. 오늘이 장날이라는 소문을 듣고 찾아온 밴드 비스무리한 일행이다. 도대체 사형날이 장날이라고 소문난단 말인가. 무슨 한 나라의 독재자도 아니고, 분명 슬퍼하는 이들이 있는 이런 때에 말이다. 게다가 그날 밤엔 신나는 축제를 벌였다. 무엇이 잘못 됐는지 모른 채 그저 앞사람의 의식을 좇으며 말과 행동을 하는 건 아닌지. 정말 오싹했다.
종교는 왜 존재하는가. 나는 종교인이 아니기 때문에 적절한 답변을 하지 못하지만 적어도 종교는 마음에 평안함을 주고 나를 좀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간다고 믿는다. 다만 이 의미가 조금만 퇴색된다면 종교만큼 무서운 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는 십자군전쟁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 중시의 마녀사냥도 참 무섭다. 스티븐 킹의 단편 '미스트'에서도 종교의 방향이 엇나가면 어떤 모습을 볼 수 있는지 알았다. 인간은 나약한 존재인만큼 신에게 기대고픈 마음도 강하다. 그리고 너무나 큼 믿음은 언제나 자신에게 좋게 다가오지 않는다. 투형이 잘못됐음을 아는 사람이 분명 존재했을 것이다. 하지만 신의 뜻이라고 울부짖으며 돌을 든 이들이 있다. 자신의 사고 따위는 없고 그냥 될대로 되라는 식이다. 비단 종교만의 문제만은 아니다. 맹신과 군중심리는 언제나 무섭다.
사실 단순한 영화다. 스토리는 몇 줄 안에 다 쓸 수 있다. 하지만 단순한 스토리가 중요하지 않다. 그 안에 담긴 무언가가 가장 중요하다. 아직 덜 영근 머리를 열심히 쥐어짜봤자 이만큼밖에 사고하지 못한다. 그래도 참 의미있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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