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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이야기/독서 노트

퍼레이드 - 요시다 슈이치

by 양손잡이™ 2012. 6. 23.
퍼레이드 - 8점
요시다 슈이치 지음, 권남희 옮김/은행나무



054.


  청춘소설은 성장소설과 읽는 맛이 확연히 다르다. 아쉽게도 우리나라 소설 중에 정말 손에 꼽는 청춘, 성장소설을 읽어본 적이 없다. (작품이 없는 게 아니라 읽은 경험이 없을 뿐이다) 내 기준에선 성장소설은 서양이, 그리고 청춘소설은 일본이 강세를 보인다. 서양 성장소설은 전혀 겪어보지 못한 서양문화를 다룬다는 점에서 그렇고 일본 청춘소설은 이상하리만치 날라리 기운을 띄기 때문에 그렇다. 날라리 기운이란, 나쁜 뜻은 아니다. 서양에서 한참 히피문화가 떠돌았듯이 일본의 8, 90년대는 서양과의 많은 개방을 통해 다소 자유분방한 기운이 넘실거린다. 그무렵 우리나라는 한참 민주화를 위해 정권과 싸웠기 때문에 글에서 불타는 청춘은 조금 어두운 면이 있다.


  도쿄의 한 멘션. 원래 한 명만 거주해야 하는 이곳에 무려 5명의 남녀가 살고 있다. 선배의 애인을 호시탐탐 노리는 요스케, 인기 배우와 비밀리에 연애 중인 고토, 매일 밤 술에 찌들어 사는 미라이, 남창 일을 하며 젊을을 태우는 사토루, 그리고 영화 관련 일을 하는 나오키. 나이도 제각각, 직업도 제각각, 성격도 제각각인 5명. 각 인물에 대한 설명을 보면 누구나 추측하겠지만, 모두 썰렁하다. 회사를 다니는 내 입장으로 보면 사회에서 원하는, '똑바로' 사는 사람은 없다. 대학생이란 요스케는 도무지 공부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고 무직인 고토는 티비에 나오는 연애상대를 보며 그에게서 연락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아직 미성년인 사토루는 밤일에 종사한다. 미라이는 잡화점 점장이란 직함을 가지고 있지만 매일 술독에 빠져 산다. 도무지 다들 나이에 맞게 사는 것 같지 않다. 독립 영화사에 근무하는 나오키만이 이들 중 그나마 '정상'의 범주에 가까워 보인다. 행동거지도 어른스럽고 말이다.


  때때로 "이 세계에서는 누구나 주인공이다"라는 사이비 인도주의 풍의 대사를 종종 듣는다. 단순히 그런 논리로 따지자면 '이 세계'가 모인 '이 세계들'에서는 누구나 주인공이 된다는 뜻이며, 누구나 주인공이라는 것은 결국 아무도 주인공이 아니라는 말이나 다름없다. 그것 역시 그런 대로 평등한 세계 같다는 생각이 들고 현재 우리 생활과 아주 가까운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아무도 주인공이 아닌 세계가 되기 위해서는 엄밀히 그 전에 역시 누군가 주인공인 이 세계가 필요하다. (184쪽)


  소설은 인물 수와 같은 5장으로 이루어져 있고 각 장마다 각 인물이 주인공이다. 한 이야기에서 다른 인물들은 조연으로 등장한다. 각 이야기는 서로 독립적이면서도 조금씩 연결되어 있다. 전 장에 나왔던 한 장면이 다음 장에서 소도구나 중요한 기폭제로 사용된다. <퍼레이드>라는 한 작품에서 그들이 돌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자신의 세계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할 뿐이다. 비슷한 환경에 함께 있으니 멀티버스가 마치 유니버스처럼 보인다. 참 유쾌한 소설이다.


  하지만 뒤로 갈수록 소설은 괴상해진다. 유니버스처럼 보이는 멀티버스에 그 해답이 있다. 각자의 세계는 순수히 개인의 것이므로 서로 전혀 관여하지 않는다. 멘션이라는 유니버스에서는 티비를 보며 하하호호 웃고, 신나게 술도 마시러 다니고, 시시껄렁한 농담을 하지만 각자의 유니버스에서의 그들은 너무나 색다르다. 거실과 방 두 개로 이루어진 멘션. 겨우 방문과 벽으로 나뉜 우주일뿐인데 서로 등을 보이며 뒤돌아서는 순간 모두의 사이에는 뭔지 모를 어색함이 돈다. 장을 거듭할수록 다른 이들은 전혀 알지 못했던 사실이 조금씩 새어나오고, 함께 있으면서도 '모른다'는 감각은 상당한 불쾌감을 안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내면을 그대로 드러내지 않고 얼굴을 가릴 가면을 쓰고 산다. 모두들 거짓말을 입에 달고 산다. 처음엔 그 거짓말이 어색했겠지만 남에게 보이는 자신을 구축하려다 보니 거짓말은 무의식적 영역으로 넘어가고만다. 가장 솔직할 것 같은 사람이 속에 비밀을 가장 많이 품고 있다. 다른 사람의 우주에서는 그렇게 유쾌하던 사토루이지만 자신의 우주 안에서는 한없이 우중충하다. 사토루의 우주인 4장은, 전의 장들과 판이하게 다를 정도로 문장이 딱딱하고 어둡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충격적 결말. 그리고 그런 충격을 너무나도 괴이하게 받아들이는 인물들. 세상에나, 가면은 그정도로 깨지지 않을만큼 너무나도 단단했다.


  인간에게 정상의 범주란 과연 무엇일까. 다 비정상이고 나는 더 비정상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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