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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이야기/독서 노트

기다리는 사람은 누구나 시인이 된다 - 해럴드 슈와이저 (돌배게, 2018)

by 양손잡이™ 2022. 11. 24.

제목을 보자마자 아, 이 책이다! 시인, 나처럼 평범한 사람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존재인데, 기다리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시인이 되는 것일까? 이토록 낭만적인 제목에 빛이 바랜듯한 분홍색 표지는 이 책을 선택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하지만 첫 장을 보자마자 나는 알았지, 이 제목은 사기라는 걸.

 

기다림이라는 개념을, 친구와 두 시에 만나기로 해놓고 30분 늦으니 잠시만 기다려, 라고밖에 생각하지 않는 나로서는 앙리 베르그송이 어쩌고, <오디세우스>에서 저쩌고, 시몬 베유가 솰라솰라, 아이고 머리 아프다. 책 뒷편의 광고문구는

 

기다림, 시간의 선율과 공명하는 마음의 산책 - 문학과 예술, 인문학을 경유하며 탐색하는 생의 비밀스런 사건

 

이란다. 심지어 영문 제목은 그냥 <On Waiting>이다. 그 어디에도 시인의 ㅅ 자도 보이지 않는다. 아, 출판사의 속임수에 깜빡 넘어간 것이다.

 

들끓는 분노와 치미는 배신감을 뒤로하고 어찌됐든 책을 넘겨보기로 했다. 저자는 기다림을 부정적인 개념으로 치환한다. 생활의 템포가 빨라진 현대에서 기다림은 이 현대성을 방해한다(27쪽). 시간이 곧 돈이 되는 지금 시대에, 게다가 그 기다림이 아무 목적 없는 기다림이 된다면 정말 최악의 경험이 될 것이다(35쪽)

 

많은 사람들이 기다림에 대한 책으로 사무엘 베케트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를 이야기할 것이다. 극 안의 두 인물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는 ‘고도’라는 인물이 오기를 기다리지만 막이 내릴 때까지 고도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만약 내가, 고도가 언제 오는지, 그(그것)가 사람인지 강아지인지 신인지 저승사자인지 원자폭탄인지 알 수 없는 세상에 떨어진다면 절망적일 것이다. 저자의 말대로 현대를 살아가는 나에게 정체를 알 수 없는 기다림은 그저 시간낭비일 뿐이고 기다림은 그 자체로 목적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라는 기다림의 시간을 조정하지 못한다. 앙리 베르그송은 설탕이 녹을 때까지 “나는 좋든 싫든 기다려야 한다”라고 말한다. 단 커피를 마시고 싶은 나의 욕구와 의지가, 물리학적으로 정해진 설탕이 녹는 시간을 어찌 할 수 없는 셈이다. 그는 우리가 이 ‘비조율’의 시간을 기다리는 동안에만 시간을 경험하게 된다(41쪽)고 말한다. 컴퓨터 게임을 할 때는 두세 시간이 훌쩍 지나가지만, 플랭크는 고작 30초 버티고는 초침이 빨리 움직이기 바라는 것과 비슷하려나?

 

결국 기다림은, 우리가 온몸으로 거부하지만 필연적으로 맞닥뜨리는, 하지만 그 시간을 조정하지 못하고 시간을 온전히 느끼며 초조하게 서성거리고 시계를 보게 만드는, 삶의 악당 같은 존재가 되고 말았다. 기다림이 이렇게 나쁜 개념이었다니! 하지만 저자는 지루하고 의미없을 것 같은 기다림이 우리 삶에서 꼭 필요하다고 말한다. 크게 두 가지를 주목해봤다. (여담으로, 솔직히 말하자면, 책 내용이 복잡해서 단순한 나로서는 굵직한 내용밖에 못 읽어냈다는 게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앞서 우리는 기다리는 동안에만 시간을 경험할 수 있다고 말했다. 평소에 느끼지 못했던 시간을 온몸으로 견디면서 우리는 시간과 자신을 분리해서 볼 수 있다. 이때 자신을 바라보는 철학적 인식은 내부로 깊이 들어간다. 우리가 더 깊은 곳에 닿을수록 우리를 표면으로 밀어내려는 반발력이 더욱 강해질 것이다. 철학적 직관이란 이 접촉이며, 철학이란 바로 이 약동하는 힘 자체라고, 베르그송은 말한다. 기다리는 사람은 철학에 할애한 시간이 없었지만 기다리는 동안에 의지와는 무관하게 철학자가 되는 것이다(55, 56쪽).

 

기다리는 동안에 우리는 초조하게 서성거리며 시간은 언제 가나, 하며 시계를 계속 흘끔거리게 된다. 너무 심심한 나머지 주변 사물을 자세히 들여다보는데, 평소에는 그냥 배경으로만 보이던 것들이 이때는 다르게 보이기도 한다. 벽지에서 작은 흠집을 찾고 한 쪽이 접힌 책을 보며 문득 침대 위 이불의 색이 칙칙하다는 생각이 든다. 기다리는 사람의 괴로운 시선 속에 주변 물체들이 고유 특징을 회복하는 것이다(78쪽). 나와 주변의 물체를 대체 불가능한 독립적인 존재로 인식하면 모든 것이 낯설게 느껴지고, 그 순간 우리는 얽매여 있던 동일화의 도식에서 벗어나 예술을 발현시킬 수 있는 셈이다(158, 159쪽).

 

책을 다 읽고 나시 제목이 어느정도 수긍이 간다. 기다림은 우리 삶에 철학과 예술을 비추는데, 살면서 기다리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그래도 시인은 너무했잖아. 분하다. 이렇게 말하고나니 속은 느낌이 더 강하게 느껴진다.

 

지루하고 의미없고 돈 안되고 피할 수 없는 기다림. 하지만 주변을 바라보고 새로운 세계로 침잠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기다림. 나는 앞으로 살면서 이 시간을 다르게 바라볼 수 있을까? 글쎄, 잘 모르겠다. 적어도 시인은 못될 것 같다.

 

 
기다리는 사람은 누구나 시인이 된다(철학자의 돌 6)
● 찰나의 문명ㆍ가속 사회에서 ‘기다림’의 시간과 경험은 왜 중요한가? 『기다리는 사람은 누구나 시인이 된다―기다림에 대하여』(원제: On Waiting)는 ‘시간의 지속’(체험되는), 즉 ‘기다림’이라는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피해야 할 것으로 간주하는) 시대에 기다림의 실존적 의미를 탐구한다. 현대 문명이 시간의 압축화라는 인간 삶의 근거를 새롭게 만들었기 때문에 현대인의 시간 감각, 지식과 정보의 습득, 타인에 대한 이해와 수용 등 시간을 매개로 한 경험이 이전과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게 저자 해럴드 슈와이저의 문제의식이다. 그리고 여기서 나아가 ‘기다림’의 시간과 경험이 왜 여전히 중요한 의의를 가질 수 있는지를 문학과 예술, 인문학을 경유하여 풀어낸다. 사뮈엘 베케트의 문제적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가 보여주었듯이, ‘기다림’은 어떤 목적이 있는 것이기보다는 어쩌면 우리 삶 자체를 은유할지도 모른다(31쪽). ‘기다림’의 탐구가 인간학인 까닭이다.
저자
해럴드 슈와이저
출판
돌베개
출판일
2018.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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