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꿈의 이야기

5분

by 양손잡이™ 2011. 5. 5.
5분



  오랜만에 누나네 가족이 놀러왔다.
  누나네가 놀러왔다고 내 저녁이 그리 바뀔 일은 없다. 백수 티를 내지 않으려고 대충 말쑥이 입은 옷으로 인사하고 얼른 방으로 들어왔다.
  아빠와 형부의 큰 안부인사, 엄마와 누나의 부엌에서의 인사. 거실은 시끌벅적하지만 내 방은 컴퓨터 팬 돌아가는 소리만 그득했다. 28살 백수가 무슨 염치로 저기 겨서 웃나. 조용히 인터넷 창을 뒤적거렸다.
  조금 있으려니 문이 열리고 외조카 J가 들어온다. 내년에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J. 나와는 다른 이유지만 역시 거실의 분위기에 껴들지 못하고 매번 내 방으로 들어온다.
  서로 인사를 주고받고 다시 제 할 일로 돌아온다. 힐끔 보니 처음 보는 핸드폰이 J의 손에 들려 있었다. 새로 산 핸드폰인 듯하다. 침대 가에 앉아 핸드폰을 꾹꾹 눌러보고 있다.
  외삼촌으로서 매번 인터넷이나 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안 좋아 보여 오늘은 녀석과 좀 놀아주려한다. 아직 저녁 먹을 때까지는 시간이 어느 정도 남아 있다. 흠, 무얼 얘기해야 할까. 책장을 보니 때 묻은 고전문학이나 인문서가 있다. 아직 녀석에게 친구가 되어줄만치 만만한 놈들이 아니다. 그렇다고 게임 얘기를 할 수는 없잖은가.
J는 여전히 핸드폰 액정을 빤히 쳐다보며 키패드를 꾹꾹 누르고 있다.
  “J야, 핸드폰 산지 얼마나 됐어?”
  “이틀이요.”
  J는 나를 보고 씩 웃고는 대답했다.
  J가 핸드폰으로 게임이나 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메뉴를 하나하나 눌러보는 중이었다. 사용법을 익히는 중이란다. J는 이런 면에서는 또래를 앞서간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종종 있다. 애어른이라니까.
  문득 핸드폰 액정의 디지털시계가 보였다.
  “J야, 시계 볼 줄 알아?”
  J는 다시 나를 올려다보며 당연하다는 듯 예, 라고 대답한다.
  “아니, 여기 숫자 써진 거 말고 저기 벽에 걸린 거 말야.”
  벽에 걸린 바늘시계를 가리키는 내 손가락을 보고는 도리도리 고개를 흔든다. 역시, 아직은 어린애다.
  "그럼 외삼촌이 알려줄게."
  나는 종이와 펜을 가지고 왔다. 그리고 짧은 줄 두 개를 세로로, 5cm 간격을 두고 그렸다.
  "우리가 10분, 20분 말하지? 여기서 분이라는 건 나눈다는 말이야. 그리고 저 시계에서는 저 큰 간격이 5분이야. 시계 봐봐. 큰 간격이 12개지?"
  J는 손가락으로 틈의 개수를 천천히 샜다. 그리곤 예, 라고 답했다.
  "간격이 1개에 5분이야. 그리고 시계에는 간격이 12개가 있고. 자, 그러면 시계 한 바퀴 다 하면 몇 분일까?"
  J는 종이에 정말로 5를 12번 더하고는 -시간이 꽤 걸렸다- 자신 있게 60이라 말했다.
  "맞아, 60분이야. 우리는 시계 한 바퀴를 한 시간이라고 하지? 한 시간은 60분 인거야."
  난 원래 말주변이 없다. 한번 말하기 시작하면 봇물 터지듯이, 아무 의미 없이 말하는 경향이 있다. 지금도 그렇다. 애당초 하려던 말은 이게 아니었는데. 얼른 다시 주제를 돌렸다.
  "아니다, 다시 다시. 자 여기 선 두개 보이지? 이게 몇 분이라고 했지?"
  "5분이요."
  "그래, 이게 5분이야. 분은 나눈다는 거고. 다섯 개로 나눠진다. 그러면 선을 어떻게 그어야 할까?"
  J는 한참 고민한다.
  선과 선 사이에 줄을 그었다 지웠다, 손가락으로 수를 꼽아가며 한참 생각하다, 조심스럽게 두 선의 사이에 막대 몇 개를 그려 넣었다.
  "틀렸지롱~"
  J는 5분을 6분으로 늘렸다. 선이 하나 더 들어간 것이다. 아마 다섯 개로 나눠진다는 말을 공간을 나누는 게 아니라, 진짜 선 다섯 개로 나눠진다는 말로 이해한 듯하다.
  "답은 이거야."
  난 종이 다른 곳에 아까와 같은 선을 두개 긋고, 안에 네 개의 선을 그었다.
  "봐, 이게 다섯 개로 나눠진다는 거야."
  J는 아직 이해 못한 듯한 얼굴로 그 그림을 뚱이 쳐다보았다.
  "다섯 개로 나눠진다면서요."
  뾰루퉁한 목소리로 J가 말했다. 역시, 아직 어려. 마치 내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를 처음 접한 듯한 기분이 들 거다.
  "봐, J야. 여기 사이에 간격 개수를 세어봐. 다섯 개지?"
  J는 자신의 그림과 내 그림을 비교해보고 있다.
  "나도 어렸을 땐 헷갈렸어. 원래 다 그래. 뭘 알아간다는 건."
  "그래도요."
  J는 여전히 종이를 보고 있다.
  "그래도 뭐?"
  "그래도 어차피 똑같은 5분 아니에요?"
  "어? 맞지."
  "그러면 뭐."
  J는 흥미가 떨어진 듯 핸드폰을 다시 집었다. 그리곤 메뉴들을 재차 확인하며 핸드폰을 꾹꾹 눌렀다.
  뭔 소리 하는 거야, 얜. J는 머리가 영근 건지, 덜 익은 건지 당최 모르겠다.
  "에유, 나도 모르겠다!"
  난 침대에 벌렁 누웠다. 배가 꼬르륵거린다. 5분은 무슨, 3분 요리가 절실히 떠오르는 지금이다.
  "J야, 저녁 먹어라."
  거실에서 누나가 J에게 소리쳤다. J는 얼른 예, 라고 크게 대답하며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곤 일어났다.
  난 찾지 않네. 아무도 반겨주지 않는 나라도 밥은 먹어야겠지. J가 내 손을 잡고 나가자고 한다. 웃으며 일어났다.
  줄곧 앉아있어서 그런지 머리가 핑 돈다. 고개를 곧추 들고 벽을 보니 시계가 돌고 있다. 눈앞에 도는 빛무리가 시계를 가려 몇 시인지는 잘 보이지 않는다.


2,441자
반응형

'꿈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네가 있든 없든, 살고 있다  (0) 2011.05.13
무제  (0) 2011.05.13
안부를 묻는다  (2) 2011.05.08
그날 밤, 우리들  (0) 2011.04.28
J에게 보내는 편지  (0) 2011.04.28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