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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이야기/독서 노트

가족, 그리운 이름이여 - 허삼관 매혈기 (위화)

by 양손잡이™ 2011. 6. 22.
허삼관매혈기
카테고리 소설 > 중국소설 > 중국소설문학선
지은이 위화 (푸른숲,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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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당역에서 봉화산역까지, 또 봉화산역에서 백마역까지 오는 길에 다 읽었다. 책은 350쪽이지만 줄간격이 좀 커서 양 자체는 많지 않다. 그리고 환승할 때 빼고는 손에서 놓지 않았다. 괜히 많은 추천을 받았던 책이 아니다. 이 글을 보고 있으신 분들 중에 만약 이 책을 보지 않았다면, 글은 엉망이지만 책은 정말 대단하다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한다.
 

중국이 낳은 세계적인 작가 위화
그가 세상 모든 아버지에게 건네는 따뜻한 황주 한 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허삼관'이라는 사람이 피(血)를 파는(賣) 이야기(記)이다. 허삼관은 허씨 집안의 세번째 서열이라는 뜻이다. 책 서두에 허삼관은 할아버지의 마을에 사는 방씨, 근룡이와 함께 병원에서 피를 뽑아 팔고 상대적으로 큰 돈을 받는다. 그는 그 돈으로 결혼을 한다. 살면서 큰일이 있을 때, 피를 팔아 돈을 마련한다.
 

  "어렸을 때 아버지가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피는 조상에게 물려받은 거라, 사람이 꽈배기나 집, 전답을 팔 수는 있지만 피를 팔아서는 안 된다고. 몸뚱이는 팔아도 피는 절대로 팔아서는 안 된다고요. 몸은 자기 거지만, 피는 조상님 거라구요. 당신은 조상을 팔아먹은 거나 다름없어요." (118쪽)



  물론 그 큰일에는 말도 안되는 선물(?)을 주는 일도 있지만 말이다. 그런 허삼관에게 아들 셋(일락, 이락, 삼락)이 생기고, 알고보니 일락이가 아내의 전 애인인 하소용의 아들이란다. 허삼관은 그런 일락이를 미워하고, 일락이가 방씨네 아들을 다치게 했을 때는 내가 돈 못 갚겠다 하며 하소용에게 가라고 한다. 그러면서 결국은 허삼관이 병원값을 치뤄준다. 이래저래 미움받는 일락이가 되겠다. 가족 모두 국수를 먹는 판에 일락이만 조그마한 고구마를 사먹으라고 내몬다. 그런 일락이는 서럽다.
 

  "저도 몰라요. 어쨌든 집에는 안 갈 거예요……. 누가 국수 한 그릇만 사주세요. 그럼 제가 친아들 노릇 할게요. 누가 국수 좀 사주세요, 네?" (187쪽)



  피로 이어진 아들이 아니어도 이미 십여년을 제 손으로 키운 자식이다. 그런 일락이어도, 허삼관은 아이를 업고 걷는다. 아래 장면은 정말 코를 시큼하게 만든다.
 

  "이 쪼그만 자식, 개 같은 자식, 밥통 같은 자식……. 오늘 완전히 날 미쳐 죽게 만들어놓고……. 가고 싶으면 가, 이 자식아. 사람들이 보면 내가 널 업신여기고, 만날 욕하고, 두들겨 패고 그런줄 알 거 아니냐. 널 십일 년이나 키워줬는데, 난 고작 계부밖에 안 되는 거 아니냐. (중략)"
  승리반점의 환한 불빛이 보이자 일락이가 허삼관에게 아주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버지, 우리 지금 국수 먹으러 가는 거예요?"
  허삼관은 문득 욕을 멈추고 온화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191, 192쪽)



  나라는 문화대혁명을 겪으면서 모든 민초들은 굶주림을 겪는다. 허삼관네 집은 아껴둔 쌀과 옥수수로 죽을 만들어 근근히 생활한다. 하지만 아무리 가난한들 운치란 게 있는 법이다. 허삼관도 잊고 있었던 자신의 생일날에, 아내 허옥란은 평소보다 더욱 걸쭉한 옥수수죽을 저녁상에 올려놓는다. 하지만 한 그릇 더 자시라는 아내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허삼관은 아들 셋에게 그 그릇을 준다. 그리고 잠자리에 들어 허삼관은 가족에게 (가상의) 요리를 대접한다. 정말 유쾌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방 안은 군침 도는 소리로 가득했다.
  "이 돼지간볶음은 내 요리다. 일락이, 이락이, 삼락이, 그리고 당신까지 다들 내 요리를 훔쳐 먹고 있는 거라구."
  허삼관이 기분 좋게 큰 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그래, 오늘은 내 생일이니까……. 자, 다들 내 돼지간볶음 맛 좀 보라구." (167쪽)



  주인공은 허삼관이지만, 그의 이름은 끝끝내 밝혀지지 않는다. 그냥 허씨 집안 남자일 뿐이다. 아내와 세 아들이 있는 한 집안의 가장. 이름만 허삼관일뿐이지, 우리네 아버지라고 해도 읽는데 전혀 지장이 없겠다. 우리네 아버지는 항상 우리에게 좋은 살코기를 주시고, 소박한 것에 기쁨을 느끼시고, 일상적인 것에 만족하신다. 돼지간볶음과, 황주 같이 말이다.
 

  "그냥 돼지간볶음 한 접시하고 황주면 돼." (329쪽)

  "다른 건 다 싫고 돼지간 볶음하고 황주면 돼."
(중략)
  "난 그냥 돼지간볶음하고 황주가 먹고 싶어." (330쪽)

  "내 평생 이렇게 맛있는 돼지간볶음은 처음이야." (330쪽)



  예전의 여린 감성으로 읽었다면 아마 펑펑 울었을 것이다. 그것도 웃으면서 말이다. 슬며시 웃게 만드는 장면도 많았고 - 특히 딱 세 페이지만에 지나간 5년이 아주 재밌었다 - 살짝 눈물을 흘리게 해 지하철에 있던 나를 당황시킨 장면도 많다. 그냥 눈가를 훔치면 얼굴이 팔리니 하품하는 척 해서 눈물이 나는 척도 했다.
 

  일락아, 오늘 내가 한 말 꼭 기억해둬라. 사람은 양심이 있어야한다. 난 나중에 네가 나한테 뭘 해줄 거란 기대 안 한다. 그냥 네가 나한테, 내가 넷째 삼촌한테 느꼈던 감정만큼만 가져준다면 나는 그걸로 충분하다. 내가 늙어서 죽을 때, 그저 널 키운 걸 생각해서 가슴이 좀 북받치고, 눈물 몇 방울 흘려주면 난 그걸로 만족한다……. (205쪽)



  난 우리 가족이 나이를 먹어간다는 게 실감이 나질 않는다. 할아버지는 80대시지만 아직 정정하시고, 친척분들 모두 건강하시다. 하지만 가끔 아버지의 등 뒤로 걸어가다보면, 예전엔 드문드문했던 흰머리가 제법 많아진 것이 보인다. 박봉에다가 스트레스도 많이 받으시는 직장에, 나는 아직도 자지 않는 새벽 5시에 일어나셔서 출근하신다. 간혹 차를 몰고 나가야 하는 일이 생겨도, 나는 그냥 좌석에만 앉아 있는다. 이 나이 먹어 아직도 운전면허증이 없기 때문이다. 사소하지만, 결코 사소하지 않은 것들 때문에, 여러가지로 너무 죄송하다.

  나도 세월이 흘러 나이를 먹으면, 돼지간볶음에 황주 같은 일상적인 것에 기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아, 황주는 꼭 데워서.


(2011년 2월 22일, 350쪽)


 위화 저, 최용만 역, 「허삼관 매혈기」, 푸른숲,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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