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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이야기/독서 노트

속물 교양의 탄생 - 박숙자

by 양손잡이™ 2014. 5. 8.

속물 교양의 탄생
박숙자 지음/푸른역사



045. 


  대학교 3학년 시절, 막 전역해 까까머리였던 나는 문득 고전읽기에 대한 욕심이 생겼다. 어떤 순으로 책을 읽어야 할까. 재밌는 거? 사람들이 많이 읽은 거? 나는 무식하게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을 처음부터 읽기로 했다. 1권, 변신이야기부터 말이다. 두 권의 책을 빌린 후 결국 한 쪽도 읽지 못하고 반납했다. 이유는 귀찮음. 아마 그때부터 읽었다면 지금쯤 200권 가량은 읽었을텐데 많이 아쉽다.


  그리고 최근 고전 읽기 방법을 바꿨다. 그냥 재밌는 것, 대중적인 것부터 읽기로 했다. 많이 번역된 순으로 읽는 거다. 많이 번역됐다는 건 그만큼 인지도가 있고 많은 이들이 읽었다는 뜻이고, 독서를 함에 있어 적어도 남들만큼은 읽었다는 뜻도 된다. 남들이 읽은 것을 나는 읽지 못했다는 건 내 자부심에 상처를 주기도 한다. 타인에게 인정받기 위한 독서는 결국 교양의 증거가 되고 만다.


  명작이라는 조건은 무엇일까. 저자는 명작의 기호가 fine인지 famous인지 묻는다. 일찍 서양문물을 받아들인 일본과 달리 우리나라는 식민지시대에 들어서야 외서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고 한다. 독서가라면 좋은 책을 읽고 싶어하기에 다들 서양 명작을 찾아 읽었다. 그들은 책을 어디서 접했을까. 원서보다는 일본에서 번역한 책이 많이 유통되었다고 한다. 대중은 그당시의 세계문학전집을 보통 '신조사판 세계문학전집'으로 기억한다. 재밌는 건 전집 목록이 선정된 이유다. 식민지 시대의 명작은 고전의 의미로만 사용된 것이 아니라 유명한 작품을 넓게 아우르는 이름이었다.


  명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문학작품이 퍼지면서, 명작은 책의 내용과 무관하게 독자의 지적 수준을 반영하는 교양의 기호로 전락하고 만다. 이는 곧 과시욕과 연결된다. 현재 미국이나 일본에 비해 우리나라 책은 문고본이나 페이퍼백 책이 매우 적다. 이는 실용보다 보관과 눈요기용 독서에 치중한다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옛날도 마찬가지였다. 울긋불긋한 종이에 인쇄된 춘향전, 토끼전보다는 황금색 술로 장식된 두꺼운 양장본인 문학전집을 선호했다. 디킨스 전집이 무려 28만원에 팔리는 황당한 사건(1920년대에 28만원이라니!)은, 책이란 저자의 목적을 독자에게 널리 알리는 데 존재하는 것이어서 가격이 싸야 정상이라는 상식에 반하는 일이었다. 이제 책 내용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감싸는 외형 또한 중요하게 됐다. 물론 식민지시대나 지금이나 책꽂이에 꽉꽉 들어선 두꺼운 세계문학전집은 자신을 과시하는 도구가 된다.


  이것이 바로 속물교양의 민낯이다. 아무리 책을 많이 사고 많이 읽은들 뭐하겠는가. 읽는 행위 자체는 무한정 올바른 일이지만 그것으로 젠 체하고 타인을 무시하며 혼자만의 아집에 쌓인다면 그런 교양은 무용하다. 교양은 과시하거나 소장하는 것이 아니라 키워내고 품어내는 것이다. 이제 마음을 비울 때이다.


  아, 물론 나는 아직 속물교양이 가득한 바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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