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게 배우는 사람 - 토머스 핀천 지음, 박인찬 옮김/창비 |
047.
창비 출판사는 페이스북에서 자사 세계문학을 함께 읽는 '책읽는당'을 만들며 책을 제공해주었다. 두 선택지 중 <제49호 품목의 경매>라는 걸출한 작품으로 널리 알려진 토머스 핀천의 작품집, <느리게 배우는 사람>을 골랐다. '경매'는 사놓고 몇 개월 간 읽지도 않아서 핀천의 매력은 귀로만 들은 상태였다. 창비에게는 미안하지만 이번 선택은 실패였다.
<느리게 배우는 사람>(이하 '사람') 토머스 핀천의 단편집이다. 총 5편의 단편이 실렸는데 앞의 네 편은 데뷔 전에 쓴 것이고 가장 마지막의 '은밀한 통합'은 첫 장편인 <브이> 출간 후 쓰였다. 데뷔 전의 작품이라면 무엇을 뜻하는가. 습작이란 의미다. 미국 현대문학의 대표작가라 불리는 핀천이지만 초창기의 단편은 내게 큰 울림을 주지 않았다.
문학 서적에서 이리도 서문이 긴 건 보지 못했다. 작품해설 포함하여 300쪽이 되지 않는 책에서 서문이 무려 31쪽까지 이어진다. 작가 본인조차 이 작품들을 읽고 '오, 맙소사'라고 외치고 돌이키고 싶지 않은 신체증상이 동반되었다고 썼다. 책은 1984년에 출간되었는데 안의 작품은 1958년부터 1964년까지 쓰였다. 쉰 살 가까이 돼서 20년 전에 쓴 작품을 읽는다면... 상상도 하기 싫다. 불과 1년 전에 쓴 글이라도 그렇게 모자른데(물론 지금도 충분히 그렇다) 20년 전이라니. 지금 쓴 글을 환갑잔치 때 손자가 낭독한다면 나는 그놈의 엉덩이를 뻥 차버릴지도 모른다.
그건 아무리 비상한 작가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사람>을 읽으면 핀천 작품세계의 씨앗이 보인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책은 언제, 왜 보아야 하는 것일까. 핀천 문학의 '꽃과 열매'인 장편을 본 다음에야 <사람>을 봐야 그나마 재미있을 듯하다. 사실 아름다운 꽃과 맛있는 과일을 경험한 후에야 씨앗에 관심이 생기지 당장 씨앗을 본다면 이건 뭐, 먹을 수도 없고 키우자니 귀찮고 그냥 버릴지도 모른다. 내게 <느리게 배우는 사람>은 그런 책이었다. 참 미안하고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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