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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이야기/독서 노트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 프리모 레비

by 양손잡이™ 2014. 8. 6.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프리모 레비 지음, 이소영 옮김/돌베개



069.


  리뷰글은 아니고, 책을 읽고 생각나는 것과 생각해야 할 것들을 몇 자 적는다.


  책의 중반부는 거의 졸면서 봐서인지 기억에 남은 건 크게 없다. 아우슈비츠에서 가해자의 행동과 피해자의 아픔은 이미 다른 책들에서 많이 봐왔기에 가슴아프게 다가오는 것은 적은 편이다. 또한 수용소 안의 사람들끼리 서로 밀쳐내고 편을 가르는 것 또한 심리학이나 사회학 서적에서 많이 다뤄온 문제이기에 그다지 새로울 건 없다. (1986년에 쓰인 책이어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


  슬슬 역사나 정치, 사회학에 관심을 갖다보니 가장 눈에 띄는 건 1장, 상처의 기억이다. 뭐, 이것도 그다지 새로운 내용은 없다. 기억을 피하기 위해 가해자는 ‘나는 위에서 시킨대로 했을 뿐이다’, ‘나는 아무 것도 몰랐다’, 심지어는 ‘나는 그런 일을 하지 않았다’라고 뻥을 친다. 반대로 피해자는 아픈 기억에서 도망치고 싶어 기억을 지우고 무의식 아래로 묻어버린다. 외려 피해자들은 (학살 사실을 알았으면서) 왜 미리 피하지 않았냐고 의뭉스러운 질문을 받기도 한다.


  이것은 기억이 변하면서 나타나는 어쩔 수 없는 현상이다. (줄기차게 인용하지만)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에 살면서 타인에게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머릿속 메모리는 휘발성이 강하고 보존력이 약하기에 불완전한 것들이 모이면 더욱 탁해질 수밖에 없다. 거기에 ‘어떤 의도’마저 섞인다면 ‘사실’은 겉잡을 수 없을 정도로 흐트러져 본모습을 잃어버린다.


  기록은 기억을 지배한다고, 캐논은 줄기차게 광고했다. 문자화되고 형상화된 기록은 불안정하고 말랑말랑한 기억을 끝내 이기고 그 위에 선다. 영화 ‘메멘토’는 맥락이 없는 기록이 어떤 비참한 결과를 빚는지 처절하게 그린다. 항상 메모장을 들고다니면서 끊임없이 무언가를 적는 행동은, 언젠가 잊혀질 기억을 끝없이 기록함으로써 조금 더 완벽에 가깝게 가려는 시도이다.


  기록이나 기억은 완전성의 차이가 있을 뿐 무언가를 보존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이 공통점에 ‘의도적인 압력’을 가하는 순간 보존의 의미는 퇴색된다. 단순히 ‘있음’을 의미하지 않고 자신(또는 집단)의 의도를 견지하게 되며 곧 이기적인 싸움으로 변한다. 불완전한 기억은 시간이 지날수록 사라지기 마련이고 종래에는 결국 기록이 곧 기억이고 진실이 되고만다. 역사는 결국 역사가들이 쓴 승리자의 기록일 뿐이라는 씁쓸한 사실만이 한번 더 떠오른다.


  너무도 당연한 말이고 절대 있어서는 안될 일이지만 이것은 현재 진행형이다.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를 편 날, 페이스북에서 한 링크를 보았다. 아우슈비츠의 유대인 학살은 없었고(유대인종 차별은 있었되 몇천만을 이유 없이 죽이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각 라거에서의 일은 그저 노동력 확보를 위한 일이었다고 말한다. 과거에 그들의 과오를 반성하고 사과했지만 근래 들어 고갤 치켜드는 네오나치의 주장이다.


  가까이 보면 일본의 망언도 마찬가지다. 군국주의를 버리지 못하고 배상을 했다는 이유로 외려 군대를 만들자고 주장한다. 일본뿐 아니라 자칭 ‘세계 평화의 수호자’라는 미국도 눈앞의 이익에만 돌아서 기억을 망각하기는 매한가지다. 위안부 할머님들도 제대로 된 기록이 남아 있지 않고 기억을 해줄 이들이 점점 줄어드어 아우슈비츠 생존자들과 마찬가지로 점점 잊혀져가고 남들에 의해 왜곡되고 만다. 그분들에게 입에 담지도 못할 상스러운 소리를 하는 이들이 많다.


  아우슈비츠는 없었어. 위안부는 사실 돈 때문에 우리를 따라다닌 거지. 친일은 무슨, 너희가 종북이야. 광주사태(부득이하게 이렇게 쓴다)는 북괴의 소행이라니까. 이 헛소리를 듣고도 반박하지 못하는 것은 그들을 논리로 이길 수 없기 때문이다. 이유는 두 가지인데, 첫째는 종전에 읽었던 <바른 마음>에서 언급했듯이 사람은 감성이 먼저고 이성이 나중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순간적으로 정해지고 그럴 듯한 이유를 붙인다. 논리로는 웬만해서 이 틀을 깨기 어렵다고 저자는 말한다.


  둘째는, 다소 시답잖다. 논리로 그들의 생각을 깰 수 없다고 말하지만, 그런 시도조차 하지 못하는 무지, 이것이 가장 큰 이유다. 아는 것 없이 무조건 옳다고 하는 것은 그들이 사랑해 마지않는 ‘팩트’를 정면으로 위반하는 일이고, 팩트를 기반으로 한 논리가 없다는 것을 단번에 증명해준다. 이러면 할 말이 없어진다. 무언가를 주장하는 사람이 지식과 논리가 없다면 어린애의 땡깡이나 마찬가지다. (다소 비약인가?)


  당연한 걸 가지고 왜 따지려드냐. 일일히 대응한다는 건 오히려 불씨를 지피는 일이니까 아예 무시해라. 이런 생각을 가지다가 독도는 다케시마가, 동해는 일본해가 되어가고 있다. 그들에게 이기고 싶다면 감정적인 대처보다 우선 무엇이든 알고 대응해야 한다. 이건 대승적인 차원에서도 필요하지만 개개인이 가져야 할 마음가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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