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이야기는 한 병원에서 시작한다. 경찰인 뤄샤오밍은 한 살인 사건의 용의자 다섯을 병실에 불러모은다. 병실에는 뤄샤오밍의 스승이자 간암 말기 환자인 관전둬가 혼수상태로 누워 있다. 뤄샤오밍은 관전둬의 머리에 머리띠를 씌운다. 머리띠는 관전둬의 뇌파를 읽어 Yes와 No의 간단한 의사표현을 할 수 있게 만든다. 뤄샤오밍은 살인 사건에 대해 말하고 관전둬에게 질문하면서 범인을 찾는다.
명색이 추리소설인데 사건을 해결하는 관전둬는 혼수상태고 뤄샤오밍은 지위에 맞지 않게 사건에서 많은 것을 놓치는 모습을 보여준다. 스무고개하듯 질문을 던지고 뇌파를 읽으면서 사건을 해결하는 전개는, 기존 추리소설에서 보여주지 않은 새로운 양상이라기보다는 다소 뜬금없다는 느낌을 준다. 하지만 뒤로 갈수록 예상 외의 이야기가 펼쳐지고 독자의 뒷통수를 여러번 친다. 뤄샤오밍의 이야기에 홀리는 순간, 우리는 작가 찬호께이에게 말려든다.
<1367>은 여섯 편의 이야기로 이뤄진 소설이다. 각 이야기마다 독립적인 이야기이기 때문에 소설집으로 생각해도 좋겠다. 모두 기승전결이 탄탄해 완성도가 높고 (반전이 있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강력한 스포일러지만) 반전 또한 기가막히다. 추리소설의 전형적인 단점 - 작가와 독자가 증거를 100% 공유하지 않는다는 점은 피하지 못하지만, 작가는 이야기에서 서술한 모든 소재를 철저히 이용해 독자를 납득시킨다. 범인을 찾는 과정의 즐거움과 뒤로 갈수록 점점 다른 사건으로 변모하는 점이 매력적이다. 사건을 파헤치고 생각치도 못한 뒷처리까지 완벽하게 하는 관전둬의 치밀함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다.
구성 또한 특이하다. 소설집이라 하면 각각의 이야기는 완전히 독립적이거나 순차적인 시간대를 갖기 마련이다. <1367>은 2013년부터 1967년의 사건까지 시간의 역순으로 전개된다.(1367은 처음과 마지막 장의 년도에서 따왔다) 역행하는 시간대는 뒤로 갈수록 관전둬의 과거와 뤄샤오밍의 성장을 보여준다. 거기에 각 시간대는 저마다 의미를 가진다. 60년대의 좌파혁명, 70년대의 염정공서(당시 경찰 내부의 부패를 조사하던 기관), 90년대의 홍콩 주권 반환까지, 작가는 홍콩의 역사를 이야기의 배경과 디테일을 더욱 풍부하게 만드는 데 사용한다. 이런 면에서 <1367>은 사회파 추리소설의 면모를 띈다.
마지막 6장은 다른 장과 달리 1인치의 화자가 등장한다. 전체 이야기 중 전개의 힘은 다소 느슨한 편이다. 하지만 이조차 작가가 노린 점이리라. 화자인 ‘나’가 누구인지 밝혀지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고 다시 책의 맨 앞을 펼칠 수밖에 없다. 6장은 독립적인 여섯 편의 이야기를 유기적으로 연결한다. 역행하는 시간대 구성은 단순히 흥미를 일으키기 위함이 아니라 소설 전체에 숨을 불어넣기 위한 작가의 철저한 계산이라고 볼 수 있다.
소설을 읽으면서 가장 불편한 지점은 관전둬(와 그의 수제자 뤄샤오밍)의 다크 히어로적인 면모다. 그들은 범인을 잡기 위해 어떤 행위도 마다하지 않는다. 거짓말과 협박은 기본이고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다른 사건을 ‘일부러' 만들기도 한다. 함정수사는 불법이 아닌가 싶다가도 시민을 지키고 더 큰 악을 처단하기키기 위해서 저 정도 거짓말은 눈감고 완벽하게 선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라는 불온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 마지막 장은 큰 의미를 가진다. 관전둬가 불법적인 행동까지 하면서 시민을 보호하려고 하는 계기를 보여준다. 단순히 말을 잘 듣는 조직원으로 살 것인가, 더욱 주체적이고 능동적으로 살 것인가. 관전둬는 이 사건을 통해 한층 성장한다. 동시에 작가는 선과 악은 한끗 차이라고 말한다. ‘나’의 이름이 밝혀지는 순간, 하나의 단순한 선택이 인생의 무한한 가지를 만들어 전혀 다른 세계를 창조하는 인생의 아이러니를 몸소 체험할 것이다.
아주 기막힌 소설이다. 650여 쪽임에도 아주 재밌게 읽힌다. 각 시간대를 설명하고 묘사하는 데 문장을 꽤나 할애했지만 거슬리는 수준은 아니다. 인물, 사건, 구성, 사건, 메세지까지 모든 면에서 뛰어나다. 감히 올해의 추리소설로 칭하겠다.
반응형
'독서 이야기 > 독서 노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빙과 - 요네자와 호노부 (엘릭시르, 2013) (0) | 2017.10.11 |
---|---|
라마와의 랑데부 - 아서 C. 클라크 (아작, 2017) (0) | 2017.10.10 |
아날로그의 반격 - 데이비드 색스 (어크로스, 2017) (0) | 2017.10.08 |
파크애비뉴의 영장류 - 웬즈데이 마틴 (사회평론, 2017) (0) | 2017.10.06 |
언어의 온도 - 이기주 (말글터, 2017) (3) | 2017.10.05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