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는 자신이 모범생이라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90년대 끄트머리 학번인 그에게, 짱돌과 화염병을 들고 가두시위를 하던 386 선배들은 “공부만 하는 대학생은 인생을 모르는 것”이라고 종종 이야기했다. 주변에서 “대학에서 배운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하면, 그는 동의하지 않으면서 고개를 끄덕이곤 했다. 그게 쿨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대학을 다니며 수많은 과목을 들으며 공부했다. 그동안 우리는 정말 배운 게 없을까? 그는 대학 입학 성공기를 다룬 많은 책을 뒤로 하고, 대학에서 열심히 공부한 이야기를 써보기로 했다. 이 책은 40대 직장여성이 대학이라는 새로운 세계에서 새로운 세계를 보낸 20대 초반을 돌아보는 성장기다(11쪽). 그 시절의 지식과 공부가 지금의 자신에게 어떤 자산이 되었는지, 열심히 노력한 시간들이 예술과 삶을 바라보는 시선을 어떻게 정립해 주었는지를 말한다.
그의 전공은 고고미술학과이다. 그래서인지 그가 공부했던 과목은 대부분 인문학 - 우리가 흔히 인문교양이라 부르는 수업들이다. 고고학, 미술사(동서양, 심지어 인도까지!), 언어(한문, 중국어, 프랑스어, 라틴어), 문학, 종교학, 심리학까지, 분야를 가리지 않고 많은 수업을 들었다. 심지어 학부 시절 법학개론을 듣고 지적소유권으로 박사과정까지 밟았다니, 과목의 범위가 넓디도 넓다.
저자에게 교양이란 자신의 세계를 공고히하되 다른 세계가 틈입할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이다(10쪽). 남과 같은 것을 보면서도 뻔하지 않은 또 다른 세계를 품을 수 있또록 하는 데 의의가 있는 것이다(62쪽). ‘아는만큼 보인다’는 말은 뻔하지만, 지겹게 생각했던 공부가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을 넓히는 하나의 일환이라 생각하니 새롭게 느껴진다. 어떤 건물을 보고 웅장하다, 아름답다, 이렇게 간단한 느낌만을 말하는데 그치는 나와 달리, 역사와 건축에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는 그 건물을 다른 가치로 볼 것이다.
책이 인문학만을 다뤘다는 점은 매우 아쉽다. 공과계열은 그렇다 쳐도, 순수과학분야의 수업은 충분히 교양의 영역인데 말이다. 인문학이 사람과 관계를 다룬 학문이라면, 과학은 세계의 원리에 대한 이야기다. 상대성 원리와 양자역학의 세계가 얼마나 흥미진진한데. 오일러 공식 - 일명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수식을 다룬 유튜브 영상을 보다보면 과학과 수학도 미술, 건축만큼 아름다운 학문이라는 생각이 들곤 한다.
책을 덮고서 나는 대학에서 뭘 배웠는지 돌아봤다. 대학 4년 동안 전공(화학공학)수업을 듣기도 바빴다. 하루에 두 개씩 전공수업을 듣고, 그날그날 과제를 끝냈으며, 친구들과 피씨방을 가거나 도서관에서 소설을 읽으며 저녁까지 보냈다. 시간도 모자라고 졸업 필수가 아닌 선택 과목인 수업(특히나 교양수업)은 굳이 찾아 듣지 않았다. 여러 과목을 듣고는 싶었으나 단순히 배우고 듣는 차원에 머무르고 싶었지, 암기를 하고 시험을 치기 싫었던 것 같다. 그나마 졸업 필수라 들었던 서너 개의 교양 수업은 나에게 어떻게 의미일까. 지식이 아닌, 그저 낮은 학점으로만 남지 않았을까? 학점마저 가성비로 바라보던 당시의 내가 아쉽기만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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