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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이야기/독서 노트

일에서 충만함을 찾는 법 - 인생학교 | 일 - 로먼 크르즈나릭

by 양손잡이™ 2013. 5. 4.
인생학교 | 일 - 7점
로먼 크르즈나릭 지음, 정지현 옮김/쌤앤파커스



040.


  화장실 휴지마냥 돌돌돌돌 잘 풀려나가는 인생이라고, 살아왔던 시간에 대해 자평한 적이 있다. 학창시절이 큰 모 없이 지나간 것은 둘째 치고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취업이 그리 어렵지 않게 다가온 건 사실, 천운과 같다. 청년실업 백만시대에 이런 말을 하면 역적 취급을 받겠지만 취업고민은 그리 많이 하지 않았다. 잘나가는 대기업에 떡하니 들어와놓고선 일 때문에 머리를 쥐어싸매는 건, 취업을 꿈꾸는 많은 이들에게 돌맞을 짓일까? 그래도 넌 취업이라도 하고 그런 고민을 하지, 나는 아직도 집구석에서 공부나 하고 있다고! 그들의 외침이 들리는 것 같다. 하지만 직장과 일에 대한 고민은 1년차 신입사원이나 20년차 과장님이나 마찬가지이다.


  고민의 이유는 단연 일과의 일체감 부족이다. S전자에서는 전공인 화학공학을 살릴 길이 없다. 4년 동안 열역학, 증류탑의 단수 계산, 플랜트 설계 시뮬레이션을 신나게 하다 왔는데 막상 취업을 하니 아무 쓸모없다. 기계 만지고, 수율 관리하고, 타부서에게 책임 떠넘기고. 4년 대학공부, 아니 초중고등학교까지 합쳐 16년 공부가 무용지물이 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기계의 구동원리나 공부하고 설비를 뜯고 조립할줄만 알면 된다. 선배들에게 이론적인 것을 물으니 다들 고개를 젓는다. 그런 건 모른다고, 알 필요 없다고. 이런 과정에서 자연스레 '나는 여기서 뭘 하는가'라는 의문이 든다. 하루 9시간, 5일, 52주, 총 2300 시간 정도, 인생에서 1/3이 넘는 시간 동안 회사에 머무르면서 자신이 발전한다는 생각이 든 적 있는가. 업무적으로 발전을 한다 해도 그게 과연 자기에게 얼마나 즐거움을 줄 것인가. 크게 크게 노는 대기업은 자괴감이 더욱 심하다. 내가 일의 주체가 되어야 하는데 나는 그저 일을 하는 노동자에 불과하다는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계속되는 고민 속에 결국 회사를 나갈 결심을 했다. 학생 시절엔 공부가 그렇게도 싫었는데 이제는 칠판 보며 필기하고 시험공부 하는 게 더 나아 보인다. 여태껏 했던 공학 공부와 정반대 분야이면서 꾸준히 관심갔는 인문학 분야를 파는 건 어떨까, 이래저래 고민한다. 많은 친구와 이야기하고 여기저기 알아보지만 결국, 회사에 남는다. 회사가 주는 돈, 대기업 직원이라는 사회적 지위를 포기하기엔 새 길이 너무나도 위험해 보인다. 세상에서 제일 고달픈 직업이 월급쟁이라지만, 역설적이게도 월급쟁이만큼 편한 직업도 없다. 일정 수준 이상 일만 하면 통장에 돈이 꼬박꼬박 입금되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연에게 수많은 위협을 받던 선사시대부터 안전을 갈망했다. 때론 모험이 필요할 때가 있었지만 한번 안전의 단맛을 맛보면 쉽사리 헤어나오지 못했다. 20일만 되면 250이 넘는 숫자가 통장에 찍히는데 회사에서 나가면 당장 다음 달 카드값도 막기 힘들다. 적금에 얼마를 넣고 펀드에 얼마를 투자하겠다는 둥의 제태크 계획도 완전히 틀어진다. 돈에 대한 열망은 그리 크지 않다. 돈을 꿈보다 중요하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돈이 주었던 안정된 생활을 버리기가 힘든 것이다. 돈이 사회적 지위의 절대적 결정요인은 아니지만 영향이 큰 건 마찬가지이다. 돈이 없음으로 인해 사회적 지위마저 박탈당한다는 느낌이 든다. 일을 그만두지 못하는 이유는 그냥 무서워서이다.


  돈도 무섭지만 성공 가능성도 전혀 가늠할 수 없다. 아무리 인문학이 뜨는 요즘 세상이라고 하지만 이제 막 인문학에 입문한 사람이 성공할 수 있을까. 다른 공부를 하고 싶다는 욕망은, 사실 지금의 일이 고되서 벗어나고 싶다는 핑계일지도 모른다. 당장 힘드니 벗어나서 다른 일을 해본다. 그런데 그것도 힘들다. 나에게 맞는 직업이 무엇일까 방황하다가 그저 그런 인생을 산다. 다른 일을 하고 싶다는 마음가짐이 진짜 자신의 꿈인지, 나약함을 투영한 핑계인지 잘 구분해야 한다. 인생의 중요한 기로에서 진짜 꿈과 가짜 꿈을 판별하려니 순간 헷갈린다. 그럼 내가 잘하는 건 뭐지? 이 직업을 왜 선택했지? 나의 경우는, 그냥, 이었다. 아무 생각없이 회사에 발을 들였다.(물론 화학공학이 필요한 회사에 지원도 했지만 낙방했다) 멍하니 들어왔으니 하고 싶은 것도, 해야 할 것도 모른 채다. 뚜렷한 목적이 없이 일을 시작했으니 머리 속 혼란은 더해간다. 왜 아무런 고민도 없이 취업을 선택했는가. 집안의 장손이라는 위치도 문제였지만 나는 사회와 너무 빨리 타협했다. 대학졸업 후 조금의 공백기간도 용납하지 못했다. 신입사원 나이에 30이라는 숫자가 있는 지금에, 25살이란 너무 이른 나이에 모험보다는 안정감을 택했다. 사회경험도 많지 않고 그저 전공서적과 토익책만 보던 대학생은 자기가 뭘 잘하는지도 몰랐다. 대학을 졸업하자 보이는 선택지는 공학도를 필요로 하는 대기업밖에 없었다.(대기업 찬양이 아니라, 아무 것도 몰랐기 때문이다) 전국을 따져보면 내 전공을 살릴 수 있는 중소기업도, 조바심을 내지 않았다면 적성을 잘 알 수 있는 시간도 많았을 것이다. 그저 그렇게 흐른 나는 꿈이 무엇인지 잊어버리고, 잃어버렸다.


  이제와서야 책과 불타는 밤을 지샌다. 다른 공부를 하고픈 마음은 굴뚝 같지만 (자의든 타의든)안정된 생활을 쉽사리 버리기 힘들다. 그렇다면 방법은 한가지 뿐이다. 자신의 일에서 목표의식을 갖추기다. 신입사원의 눈으로 보면 부서 일은 정말 단순하다. 기계를 만지고 효율을 높인다. 이런 단순한 일을 하는데 부서는 점점 발전한다. 짧게 보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이지만 길게, 시간이 지날수록 기술도 같이 향상되기 때문에 끝없이 배우는 자세로 일에 임해야 한다. 이런 데서 자신의 목표를 얻는 것이다. 정말 재미없어 보이겠지만 부서의 한 분야에서 최고의 스페셜리스트가 되는 것. 우물 안 개구리로 보인다면 잘못 판단한 것이다. 작은 집단에서 최고가 될 수 있다는 말은 큰 집단에서도 노력한다면 충분히 성공할 수 있다는 말과 같다.


  도스토옙스키는 모든 인간에게 가장 끔찍한 벌은 '평생 동안 아무 쓸모도 의미도 없는 일을 하도록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시간이 지나고 보니 내가 한 일은 아무 것도 아니더라, 한숨만 푹푹 쉰다면 이 얼마나 허무한 인생인가! 지겨운 밥벌이가 아닌 가슴 뛰는 천직으로 향할 준비가 됐다면, 그게 지금의 생활을 뒤흔들고 사회적 기반을 무너뜨린데도, 내가 아니면 할 사람이 없다고 생각된다면 해야 하는 게 정답이다. 안된다를 외치지 말고 어떤 일엔가 재능이 있다고 믿으며 끝없이 자신을 탐구해야 한다. 돈은 인생과 열정과 만족을 줄 수 없다. 무엇이 중요한가를 치열하게 고민하는 것, 일뿐 아니라 인생에서 충만함을 찾는 시발점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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