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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이야기/독서 노트

거짓이 진실이 되는 순간 - 인간과 사물의 기원 (장 그노스, 김진송)

by 양손잡이™ 2013. 5. 1.
인간과 사물의 기원 - 10점
장 그노스.김진송 지음/열린책들



036.


  두 달 전 읽은 김진송의 책 <이야기를 만드는 기계>에는 악마의 형상을 한 나무 조각과 함께 '암흑의 신 페트롤리우무스의 전설'이라는 이야기가 써 있다. 석탄과 석유를 암흑의 신이 플린 피로 묘사한 뒤 악마의 검은 피가 인류의 역사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에 대한, 소설의 형식을 빌린 글이다.(주1) 많은 소설을 봐왔지만 이처럼 신선한 글은 많이 보지 못했다. 이 글은 <인간과 사물의 기원>(이하 <기원>이라는 책에서 발췌했단다. 배송기간 이틀을 기다리기조차 싫어서 그날로 서점에 가서 책을 골라왔다. 책을 산 지 두 달이 넘도록 펴보지도 않았으니 결과적으로 그때의 책 구입은 인터넷 서점 할인금액과 왕복 교통비만큼의 손해가 있었다. 허나 책을 다 읽은 지금, 그 값어치를 톡톡히 했다는 것을 느낀다.


  <기원>은 거짓말을 담은 책이다. 저자 장 그노스는 소설이 아니라고 하지만(정확히는 그런 구분 따위는 신경쓰지 않는다고 말한다) 명백한 소설이다. 첫째로 모든 이야기가 전혀 말이 되지 않는다. 개와 의자가 서로를 닮고 싶어서 비슷한 모양새로 진화했다든가, 비행기가 하늘에 뜨는 원동력이 염력이라든가 하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풀어낸다. 둘째로 글을 풀어쓸 때의 시점이다. 보통의 이야기에서는 현대인이 분명한데, 지금의 서울이 유적지로 발견됐을 땐 먼 미래의 고고학자가 되고 심지어 '철갑충과 그 기생 동물'에서는 차와 인간을 연구하는 외계인이 되기도 한다. 그러니까, <기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구라에 의존한 이야기다.


  재밌는 건 허무맹랑한 진실과 거짓말을 구분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진실과 거짓은 한 끗 차라는 말도 있듯이 이 소설은 아주 그럴 듯하다. 이는 논리의 전개에 의거한다. 삼단논법- 'A가 B이고 B가 C라면 A는 C다'라는 명제는 아주 단명한 논리다. 재밌는 건 가장 처음 가정이 틀리다면 결론도 틀리지만 논리적으로는 적확하다는 것이다. <기원>은 삼단논법의 허점을 교묘하게 파고든다. 장 그노스는 처음부터 자신이 거짓말을 할 것이라고 단언한다. 완벽한 논리로 구성된 이야기를 따라가다보면 어느새 진실과 허구의 경계가 희미해진다. 이야기가 거짓임을 분명히 알지만 논리적으로 아귀가 딱딱 들어맞는 데다가 명쾌하기까지 하니, 머리가 어지러울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과연 내가 아는 진실이 정말 '진실'이 맞는가. 우리가 역사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 증거와 개연성에 의존한다. 최초의 인류라는 것은, 그 전(前) 시대 인류의 뼈가 발견되기 전까지만 '최초'이다. 인간의 역사 연구는 진짜 역사가 아니라 학문 오류의 역사일지도 모른다. 증거(가정)가 거짓일지도 모르는데 완벽한 개연성(논리)만 붙들고 진짜를 외치며 으스대는 꼴이다. <기원>은 학문의 논리적 허구성을 말하며, 더불어 세상을 거꾸로 보는 능력을 선사한다.


  진실과 거짓과 논리, 이런 것들을 다 차치하고서도 <기원>은 텍스트 자체로도 매우 흥미롭다. 가장 재밌게 읽은 꼭지는 '비행기가 뜨는 힘'이다. 보잉747은 무게가 150톤에 육박한다. 이런 무게가 공기층과 얇디 얇은 날개가 만든 양력으로 하늘로 뜨다니, 과학적 근거가 확실해도 믿기지가 않는다. 그렇다, 장 그노스에 의하면 비행기는 인간의 염력에 의해 하늘을 난다. '난다'는 것은 인간을 지배하는 중력에 완전히 위배되는 개념이다. 자신과 반대되는 개념을 본능적으로 아는 승객들은 비행기가 하늘로 뜨려는 순간 누구랄 것도 없이 염력을 발생시킨다. 거짓말인 게 눈에 딱 보이지만 너무나도 교묘히 이야기를 전개하기 때문에 깜빡 속을 수밖에 없다. 아니, 염력은 진짜일지도 모른다.


  '강자 보호와 약자 처벌에 관한 법률'(일명 강보약처법)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국가의 성장이 정체된 시기, 정부는 국민을 점수로 구분한다. 그리고 각 계급(본문에서는 계급이라고 부르지 않지만 재산과 자위, 학력, 직업 등으로 단계별 점수를 매긴 것으로 보아 계급이라고 칭해도 좋을 듯하다)은 각자의 색깔카드를 갖는다. 카드는 큰 힘을 갖는데, 어떤 사고가 벌어져도 색카드 하나면 모든 상황이 종료된다. 보다 하위 색카드를 가진 사람은 무조건 상위 카드에게 양보해야 한다.(이외에도 많은 혜택이 있다) 인도의 카스트 제도와 마찬가지인 셈이다. 강보약처법은 카스트 제도와는 다르게 얼마든지 계층간 이동이 가능하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죽어라 일한다. 국민이 열심히 일할수록 나라는 번창한다. 하지만 내가 열심히 일하는 동안 다른 사람은 손가락만 쪽쪽 빨지는 않는다. 결국 계층간 벽은 절대 넘을 수 없다. 많은 요소로 사람에게 점수를 매기고 점수에 따라 등급을 나눈다는 것은 인권침해에 가까운 일이지만 국민들은 아무도 불만을 가지지 않는다. 국가의 성장은 엄청나고 이제 다른 나라에서까지 강보약처법을 벤치마킹하러 오며, 무엇보다도 자신이 더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기 때문이다. 분명 부조리한 일이지만 실제로 벌어질 수 있는 가능성에, 아니 이미 벌어졌다는 생각에 참으로 무섭다.


  투박하지만 상상력만큼은 최상급이다. <기원>이 잘 알려지지 않은 이유를 잘 모르겠다. 책을 펴면 (한국에서 유독 힘있는)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나무>가 떠오를지도 모른다. <나무>에 비해 서술이 불친절하달뿐이지 서사나 상상력은 동급이라 하겠다. 허무맹랑한 거짓에 질리지 않을 자신이 있다면 <기원을> 과감히 펴도 좋다. 장 그노스는 질문한다. 그 작은 하나의 점으로부터 저 넓은 우주가 시작되었다니, 나보고 그 말을 믿으란 말인가? 오오냐, 이제부터 나도 안 믿으련다.



  주1.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할 때 암흑의 신 페트롤리우무스는 하느님과의 대결에서 패해 자신의 지위에서 내려와야 했다. 페트롤리우무스의 몸은 산산히 흩어졌고 검은 피가 대지에 스며들었다. 그 양이 너무 많아 천 년이 지나서야 하느님은 생명을 창조했다. 수많은 위험 속에서 인간이 진화하는 동안 지구 어느 구석의 늪에서 악마의 피가 새어나왔다! 악마의 피를 신비의 물이라 생각한 연금술사는 불타는 피를 끝없이 연구한다. 악마의 피는 인간에게 불을 주었고 기술을 주었으며 문명을 주었다. 동시에 악마의 피를 차지하기 위해 서로의 얼굴에 칼을 겨눴다. 악마의 검은 기운이 세상을 서서히 뒤덮자 하느님의 선물인 지구와 그 위에 사는 모든 생명은 조금씩 사그러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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