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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이야기/독서 노트

원죄의식을 파고드는 교활함 - 소송 (프란츠 카프카)

by 양손잡이™ 2013. 4. 29.
소송 - 8점
프란츠 카프카 지음, 김재혁 옮김/열린책들



038.


  오랜 기간 동안 붙잡았던 책이지만 예상했던대로,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고전 소설 독해에 어려움을 표했던 나이기에 당연한 결과였는지도 모른다. 쿤데라가 극찬했던 카프카의 아름다움은 온데간데 없었고 그저 텍스트를 읽기에 바빴다. 독서 수단을 가리지 않아야 진짜 독서인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고전을 처음부터 끝까지 전자책으로 본 건 이번이 처음이라 이번만은 그 매체애 대한 불만을 말해야 하겠다. 사람은 전자책을 읽을 때 50% 밖에 정보를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한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이번 독서를 통해 충분히 실례를 추가하였다. 사실 <거장과 마르가리따>도 그랬던 적이 있었으므로 앞의 가정은 진짜인가보다. 독서 매체가 종이책이든 전자책이든, 텍스트를 읽었으나 그 내용을 하나도 이해하지 못한 건 능력부족인 게 분명하므로 더 이상의 변명은 필요없을 듯하다.


  책의 마지막 장을 보면서까지 느껴지는 답답함은, 요제프 K가 기소당한 이유를 끝끝내 알려주지 않기 때문이다. 잠에서 깨어나자 자신이 소송에 휘말렸음을 알고 무죄를 논한다. 법정에 서서 법정과 법관의 부조리함과 모순을 이야기하며 자신을 항변하고 시스템을 비판한다. 은행에서 성실히 일하는 모습에서도 그에게 큰 잘못은 없어 보인다. 하지만 결국 중요한 건, 누군가 그를 고발했고 그는 법정에서 소송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점이다. 소송에서 벗어난다는 말은 무엇인가. 자신이 무고하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죄가 없음을 증명하려면 증거가 필요하고, 무엇보다도 자신이 지은 죄를 명확히 알아야 한다. 그런데 독자는 커녕 요제프 K조차 그 죄를 모른다. 요제프 K는 시스템에 대해 비꼬고 비판하지만 그것은 '죄가 없음'과는 원론적으로 다른 문제이다.


  잠에서 깨어났는데 형사가 들이닥쳐 당신을 체포한다고 가정해보자. 다짜고짜 당신은 기소당했다고 말한다. 그런데 왜 기소당했는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그때부터 우리는 끝없이 상상하게 된다. 어릴 때 친구 지갑을 슬쩍했던 게 화근이 되었을까? 몇 년 전 심하게 놀린 친구가 복수하겠다고 이제 와서야 나를 신고한 걸까? 어제 저녁 식당에서 돈을 내기 싫어 국에 머리카락을 넣고서 주인에게 따져 밥을 거저 먹은 게 들킨 걸까? 머리속은 복잡해지고 혼란스럽다. 형사에게 자신이 신고당한 이유라도 물을라치면 '알아서 잘 생각해보셔'라고 매서운 눈으로 말한다. 도대체 뭐지, 뭐가 문제지. 끝없는 압박 끝에 양심에 가장 찔리는 '죄'를 고백한다. (금주라고 외치고 다녔는데 사실 어제 맥주 한 잔을 마셨어요. 용서해주세요!) 그러면 형사는 옳다구나를 외치며 유죄를 말한다. 그럼 그렇지, '그 일'은 역시 너무나 큰 죄였어. 그러니까, 이 상황은 자기 자신이 죄를 알아서 토해내는 구조이다. 애초에 죄가 있어야 소송이 존재할 수 있지만, 소설 <소송>에서는 '소송'이 죄를 만들어낸다. 자기고백적 성찰이 담긴 죄의 고해가 부르는, 자신을 성장시킬 수 있는 부류의 소송이 아니다. 그러니까, 이제부터 잘하라고 식의 스크루지의 꿈이 아니란 말이다. 능력을 인정받아 젊은 나이에 부장까지 승진한 K가 자신의 직장에서 자신의 일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소송에 집착하고 일상적 삶마저 철저히 파괴되는, 생에 있어서 죄악에 가까운 일이다. 원죄의식을 교묘하게 파고들어 타인을 피폐하게 만드는 교활함이란!


  벌레로 변했음에도 직장에 나가지 못함에 걱정하는 K,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소송에 맞써 싸우는 K, 고용되었지만 어디서 일해야 하는지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 K까지, 카프카는 자신의 분신을 통해 무얼 그리 말하고 싶었을까. 사회의 부조리함? 시스템의 경직성? 산업화에 대한 경각심? 텍스트를 보는 눈이 낮아 쉽사리 정의하지 못하겠다. 하지만 언뜻 느껴지는 불편한 감각을 감히 '카프카적'에 빗댈 수 있다면, 카프카를 다시 읽고 싶다. 많은 작품이 미완성작으로 남아 더욱 아쉽다.


* 다만, 인생을 낭비한 죄는 영원히 떨칠 수 없는 업보와도 같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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