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
2015-029.
0. 원체 읽는 행위에 강박에 가까운 감정을 가졌기에, 박웅현이 말하는 도끼로 머리를 쪼개는 듯한 느낌은 커녕, 재독에 욕심을 전혀 두지 않는다. 척 하기에 능한 나이기에 이미 읽은 책은 그 가치를 잃고 책장에 장식이 되거나 중고서점에 팔리기 일쑤다. 그런 나에게 재독한 책이 생겼다는 건, 어떤 의미에서 어마무시한 일이다.
1. 이 책을 읽은 건 '12년이다. 책 때문에 한참 친해진 친구에게, 강력 추천을 받아 빌려 읽기 시작했다. 그 친구는 이 책을 읽고 정말 경탄해 마지않았다고 했지만 나에겐 쏘쏘. 생각보다 읽기 힘든 책이었다. 게다가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이라니. 단순히 제목만 보면 책읽는 척하고 단순히 위기상황을 모면하려는 법을 말하는 책 같다. 축약본, 요약본을 극도로 싫어하기에 첫인상이 좋지는 않았다.
2. 저자 피에르 바야르는 파리 8대학 프랑스문학 교수이자 정신분석가이다. 문학 교수라고 해서 엄청난 문학적 지식을 가지고 문학과 독서를 정통으로 파고들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자신조차 강의 중에 가열차에 언급하는 프루스트의 작품들을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다고 고백한다. 그는 문학 비평을 통해 충격적인 논리와 상식에 반하는 결론을 이끌어낸다.
3. 책에서 저자는 비독서를 두 가지로 나눈다. 하나는 책에 아예 무관심하며 독서를 쓸데없는 행동으로 여기는 것이다. 책을 읽지 않는다는, 우리가 보통 말하는 비독서의 뜻 그대로다. 다른 하나는 오스카 와일드의 말에서 알 수 있다. '나는 내가 평문을 써야 하는 책은 절대 읽지 않는다. 너무 많은 영향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4. 저자는 눈앞에 있는 책을 너무 많이 읽지 않음으로써 책에 완전히 파묻히지 않는 것을 강조한다. 한 책을 읽고 거기에 너무 빠져버리면 독자의 가치관은 넓어지지 않고 그 책에 국한될 뿐이다. 그는 무수히 많은 책에 침몰되지 않고 자신 안에 책들의 체계적인 관계를 만들어내는 일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책을 깊이 읽고 탐독하되 그 책의 위치를 정하지 못하는 사람과, 어떤 책 속으로 들어가지도 않으면서 모든 책 속을 돌아다니는 사람 중 어느 쪽이 더 나은 독자인지 자문해볼 수 있다.
5. 이는 교양으로도 이어진다.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열풍에서도 알 수 있듯 교양이란 무엇보다 오리엔테이션의 문제다. 독자에게 교양을 쌓았다는 것은 이런 저런 책을 깊숙히 읽고 내용을 명확히 파악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들 속에서 길을 잃지 않을 줄 안다는 것이다. 책 사이의 관계를 파악한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주장이다.
6. 그렇기 때문에 저자는 책을 읽지 않았다는 것이나 대충 읽어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은 부끄러워 할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뚜렷한 내용은 잊었어도 책에서 느낀 감정이 기억의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고 그 기억과 의미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만 안다면 그것만으로도 큰 가치가 있다.
7. 3부에서는 모르는 책에 대해 얘기할 때 대처 요령을 말하는데,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자기 얘기를 할 것을 권한다. 어차피 독서는 절대로 객관적이 될 수 없고 개개인마다 받아들이는 내용이 다르다. 자기와 다른 감상이나 느낌을 말한다 해도 뭐라 할 수 없다. 여러 상황에 있어 중요한 것은 자기 얘기를 하는 것 혹은 책을 통해 자기 얘기를 하는 것이다.
8. 저자는 오스카 와일드를 언급하며 책을 대한 적절한 독서시간은 6분이고 독서에 경계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한다. 또한 세상에는 너무나 많은 책이 있기에 상대적으로 적은 양의 책을 깊게 읽고 푹 빠져 독선적인 시선을 가지지 않기를 바란다. 하지만 독서는 재밌을 뿐이다. 어차피 저자가 말하는대로 읽는다 해도 세상에는 너무 많은 책이 존재한다. 내가 생각하지 못하는 부분은 남들에게서 얻으면 된다. 경계심과 자만을 줄이고 조금 열린 마음만 가진다면 이 문제는 모두 해결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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