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소 평론가스럽게 얘기하자면, 이 소설은 설정과 이야기가 진부한 편이다. 철없이 순수한 남자, 옆에서 짝사랑에 애태우는 여자, 암에 걸려 죽음을 목전에 둔 할머니, 그 자체가 순수와 젊음을 상징하는 여자아이, 고뇌로 인한 가출. 여기다가 성장을 한 스푼 넣으면, 짜잔! 삶의 어려움을 견뎌내고 어른이 되는 주인공 탄생!
<시간 있으면 나 좀 좋아해줘>(이하 '시간 있으면')도 이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 소설 안에는 우리에게 거창한 삶의 목표라든가 사회의 이데올로기, 미래를 뒤흔들 정도의 성장은 없다. 다만, 책의 마지막에, 이레가
할머니, 나 여행 가. 정확하게 말하면 율이를 만나러. 그런 느낌에 흠뻑 젖는 시절을 마음껏 누리러. (141쪽)
라고 쪽지를 남기고는 가출한 율이를 찾으러 집을 나서는 장면을 보면서 잔잔한 뿌듯함을 느낄 수 있다.
우리의 여주인공 이레는 6년째 율이를 짝사랑하면서도 그 사실을 쉬이 말하지 못한다. 부모님이 돌아가시던 날 느꼈던 '절정 이후엔 반드시 공포에 가까운 공허함과 슬픔이 따라온다'(58쪽)는 나름의 법칙이 그녀의 삶을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일테다. 지금의 관계가 어그러질까봐, 그냥 이정도로도 좋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사람은 원하는 것으로부터 자기를 지킬줄 알아야 한다'(82쪽)는 이레 할머니의 말대로 이레는 자신의 욕망보다 안정감과 절제를 취했으리라. 이런 생각은 이레가 동네 주민인 칸트(이국적 외모에 매일 같은 시간에 슈퍼에 들러서 이레와 율이 붙여준 별명이다)의 미술 작업실을 들러 대화를 나누면서 바뀌었을지도 모르겠다.
- 원하는 것을 자신의 공간에 단단히 붙잡아둘 수 있는 용기가 부럽네요.
칸트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 결국, 우리는 넘어진 곳에서만 일어설 수 있으니까요. (106쪽)
공허함과 슬픔에 지쳐 넘어져도 결국에는 다시 일어나야 한다. 하지만 고개를 들고 위를 쳐다보니 나를 절망에 빠뜨린 온갖 것들이 나를 내려다본다고 생각하니 다리에 힘이 들어갈리 없다. 그럴 때, 자신을 망가뜨릴 줄 알면서도 용기있게 내 공간 안에 단단히 붙잡아둔 '원하던 것'이 힘이 되어줄 것이다. 아포리즘은 우리 인생에 모순으로 다가오면서도 종종 인생에 큰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이레는 결국 자신의 고민을 끝내고 결정을 내린 것이다. 소중한 것을 잃고 마음에 구멍이 뚫린 것 같은 느낌, 퉁퉁 부은 눈을 하고서도 '아무 일도 아니에요'라고 미소 짓는 느낌에 절망할 때, 저 멀리 언덕을 넘으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손을 흔들며 나타날 것 같은 느낌, 그 사람이 웃어주는 것만으로 우주의 모든 애정을 받는 것 같은 느낌, 꼭 그사람이어야만 하는 이유를 모아 밤새 태산이라도 쌓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에 다시 흠뻑 젖기(79쪽) 위해 자신이 원하는 것을 향해 용기있게 한발을 내딛는다.
존 레논은 40살에 암살자의 총에 맞아 죽었고, 파블로 피카소는 91살에 심장마비로 죽었고, 유관순은 18살에 고문으로 죽었다(19, 20쪽). 죽음은 다들 제각각, 뜻하지 않게 찾아온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런 느낌'에 흠뻑 젖는 시절을 어느 때로 한정하거나 무심히 흘려보내지 말고 붙잡아야 하지 않을까. 구덩이 이야기밖에 하지 못하고 부족함이 많지만, 시간 있으면 나 좀 좋아해줘요. 좋아해달라는 말, 그리 거창하지는 않다. 한 공간에 앉아서 그저 이야기를 귀기울여 들어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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