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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이야기/독서 노트

유쾌함 뒤에 가려진 시대의 비극 -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요나스 요나손)

by 양손잡이™ 2013. 8. 20.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 7점
요나스 요나손 지음, 임호경 옮김/열린책들



081.


  아마 두번째로 접한 스웨덴 소설이 아닌가 싶습니다. 첫 작품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밀레니엄 시리즈지요. 북유럽 스릴러 특유의 차가움과 건조함이 그리 와닿지 않아 1권에서 접었던 시리즈입니다. 그런데 이 소설은 밀레니엄 시리즈와는 전연 딴판입니다. 장르가 다르다보니 추리 따위는 당연히 없고, 전혀 딱딱하거나 건조하지 않고 부드러우며 유머가 넘칩니다. 하긴, '스웨덴 소설'이라는 큰 틀에 가두는 건 소설을 너무 얕잡아보는 행동이겠죠.


  곧 양로원에서 100세 생일파티를 맞이할 알란은 통제되고 자기 마음대로 생활하지 못하는 양로원 생활이 싫어 탈출을 감행합니다. 쑤시는 무릎에 오줌 슬리퍼를 질질 끌고 걷지요. 버스정류장에서 자기가 가진 돈으로 최대한 멀리 갈 수 있는 버스를 탑니다. 헌데 도중에 한 사내의 트렁크를 쓱싹(?)하고 맙니다. 나중에 보니 갱의 트렁크였고, 그 갱은 알란을 쫓아옵니다. 하지만 알라은 그런 사정 모르고 자기 갈 길을 갑니다. 실종, 납치, 살인사건에 휘말리면서 자기도 모르게 유명인사가 됩니다. 이렇게 현재가 이야기의 한 축이고,


  다른 한 축은 과거입니다. 알란이 태어난 후 100년의 세월을 다룹니다. 어릴 때부터 폭약 공장에서 일을 하면서 폭탄 만들기에 열을 올립니다. (그렇다고 범죄자는 아닙니다!) 알란이 크면서 자연히 세계 역사에 뒤섞입니다. 스페인 내전에서 폭사당할 뻔한 프랑코 장군을 구하고 트루먼 대통령과 친구가 되지를 않나 핵 탄두 개발에 큰 힌트를 주고 심지어 6·25전쟁이 한창일 때 북한에서 징징대는 어린 김정일과 만나기도 합니다. 세계사의 굵직굵직한 사건 뒤에는 칼란 알손이라는, 초등교육도 이수하지 않은 보통 사람이 있던 것입니다! 엄청난 비화입니다.


  고백하건데, 생각보다 지루했습니다. 출판사에서 엄청 광고를 때리고 다들 재밌다고 손가락 치켜드니 우선 사긴 했는데 1/3 정도 까진 영 아니올시다, 였죠. 현재에 벌어지는 100세 노인의 도주극은 엄청난 사건이 벌어지면서도 너무나 태연한데다가 큰 갈등이나 위험요소가 없어요. 하긴, 나이가 먹을대로 먹은 인물들이 도망치는데 무슨 스펙타클을 바라겠습니까. 과거는 더 터무니없습니다. 오펜하이머도 끙끙대던 원자폭탄 문제를 단숨에 풀지 않나 블라디보스토크 수용소 대폭발의 주범에다 소련 물리학자와 함께 스파이로 활동까지 하다니, 이게 말이 됩니까. 아무리 소설이 허구의 사건을 다룬다지만 이건 도가 지나쳤지요.


  하지만 계속 읽다보니 알란의 매력에 폭 빠지게 되었네요. 알란이 살아온 100년의 세월을 돌이켜보면, 세상은 참 많은 이념에 지배되었습니다. 왕정, 공화정, 사회주의, 민주주의, 이런 이념은 사실 일반 사람이 이해하기 너무나 어렵습니다. 윗대가리들이 들고 일어나니까 아, 똑똑한 사람이 맞다고 하니 맞나보다 하며 그저 휩쓸려가기 일쑤지요. 프랑코, 트루먼, 마오쩌둥, 처칠, 김일성. 이 인물들이 한 데 섞일 수 있겠습니까? 그런 가운데 정치 얘기를 가장 싫어하고, 그저 휴식과 한 잔의 술만 있으면 좋다는 알란이 빛을 발합니다. 알란은 일련의 사건들을 정치적 편견 없이 자신의 시각으로 판단합니다. 자신의 청을 들어준다면 부귀영화를 주겠다는 스탈린에게, 당신의 성격이 마음에 안 드니 없는 일로 하겠다며 알란이 스탈린의 부탁을 단칼에 거절하는 모습은, 정치적 이념을 위한 행동과 사고에서 오히려 '사람'이라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빠져 있었다는 걸 극대화해서 보여줍니다.


  뒤로 갈수록 흥미진진해지는 과거와 달리, 현재는 너무나 술술 풀려갑니다. 부하를 모두 잃은 갱 두목이나 사건을 담당하던 수사반장이 오히려 알란 일행에 합류하면서 이야기는 산으로, 산으로. 하긴, 세계사의 중심에 있었던 알란의 과거보다 더 황당한 이야기는 없겠습니다만. 유쾌해보이는 여행길이지만 사실 현재의 이야기는 꽤나 심각합니다. 실종으로 시작해 절도, 납치, 살인, 거짓진술까지 지금의 눈으로 보면 깜짝 놀랄 만한 중범죄입니다. 분위기가 부드러운 이유는 등장인물들의 느긋한 성격도 있겠지만, 과거 이야기와의 대비입니다. 과거에 '사람이 빠진, 오로지 이데올로기만의 대립' 사이에서 많은 이들이 희생에 비하면 - 그것도 개미손톱만큼의 비중으로 말예요 -  현재의 사건은 아무 것도 아닌 게 되어버립니다. 그만큼 과거의 비극을 적나라하게 표현하는 셈이지요.


  유쾌하게만 생각했던 여행길(사실 도주)을 곱씹다보니 심각한 의미가 숨어 있었군요. 쓰고보니 출판사 제공 책 소개와 겹치는 부분이 상당히 많네요. 작가가 아닌 출판사가 원했던 방향으로 해석은 어느 정도 했나보네요. 뭐, 사실 꿈보다 해몽이라고 괜한 과잉해석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사실 작가는, 그저 알란의 101살의 여행을 쓰고 싶었는지도 모르죠. 여튼, 과거의 굵직한 사건을 새로운 장면으로 만나는 재미도 있는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이었습니다. 알란에게 장수의 축복을. 치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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