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한 사람의 책은 잘 읽지 않는 성격상 아마 독서모임 아니었으면 꺼내들지도 않았을 책일 거다. 딱히 배우의 팬도 아닌데다가 움직일 때 걷기보다는 자전거와 자동차를 선호하는 나에게 ‘걷는 사람’이라는 제목도 크게 마음이 가지 않았다.
하정우가 그저 영화배우, 프로먹방러, 때로 감독으로 활동하는 건 알았는데 이렇게 책을 낼 정도로 글을 쓰고 전시회에 내걸 그림도 그리는지는 몰랐다. 무엇보다도 걷기 중독자라고는 생각은 전혀 못했다. 영화 ‘577 프로젝트’에서 여러 동료와 함께 국토대장정을 하는 건 봤지만 강남에서 마포까지 출근길을 매일 걸어다니고, 강남 집에서 김포공항가지 8시간 동안 걷고, 친구들과 하와이에서 10만보를 꽉 채우고… 무슨 이런 사람이 다 있담!
나는 걸을 때 발바닥에서부터 허벅지까지 전해지는 단단한 땅의 질감을 좋아한다. 내가 외부의 힘에 의해 떠밀려가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뿌리내리듯 쿵쿵 딛고 걸어가는 게 좋다. _43쪽
책을 덮고 나면 당장 밖으로 나가 걷고 싶은 마음이 든다. 1일 30분 걸읍시다, 이렇게 걸으면 하정우처럼 성공한다, 처럼 걷자고 설득하지도 종용하지도 않는데 괜히 나가서 대지와 맞닿는 발바닥의 감촉을 느끼고 싶은 것이다. 하정우가 손목에 찬 핏빗 뽐뿌가 오는 것도 막을 수 없다!
책은 걷는 이야기가 메인이지만 요리하고 먹는 이야기, 배우와 감독 사이에서 방황하는 이야기, 직업에 대한 생각, 평소에 떠올리던 사유들을 차곡차곡 쌓아두었다. 배우 하정우가 아니라 ‘매력적인 사람’ 하정우를 알게해준 나름 고마운 책이라 할 수 있겠다. 하정우의 팬에게는 더 멋있고 인간적인 모습으로 각인되는 그런 책이겠지.
책은 전체적으로 솔직하고 상큼하나 글이 주는 무게가 다소 가벼워서 아쉽다. 차분하고 진중한 부분이 분명 있지만 전문 작가로 살아오지 않았기에 확실히 문장의 밀도가 떨어지고 같은 문장이라도 다가오는 울림이 다르다. 예를 들면,
하와이에서 나는 걷고 먹고 웃는 일에 하루를 다 쓴다. 삶의 곳곳에 놓인 맛있고 즐거운 일들을 잘 느끼는 일. 그게 곧 행복이 아닐까 하고 나는 하와이에서 생각했다. _129쪽
같은 문장 말이다. 몇 문장만 똑 떼서 보는 건 어찌 보면 작가 입장에서는 치사하게 느낄 수 있는 행위긴 하겠다만, 이런 문장은 어떤 사람이 쓰고 앞뒤 이야기가 무엇이냐에 따라서 울림통의 크기가 정해진다. 건강한 작가의 상큼한 이야기이기에 내가 기대한만큼의 무게중심을 보여주지 못해 아쉬운 것일 뿐이다. 나 혼자 단단한 글줄을 기대하고 괜스레 실망하면 안되겠지만, 이토록 매력적인 사람이 글까지 유려하게 쓴다면 더 사랑스러울 것 같아서 하는 볼멘 소리다.
그래도 결국 가벼워서 좋았다. 하정우는 다소 무거운 주제를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위트있게 풀어낸다. 책을 읽을 당시 감정적으로 힘들었는데 이렇게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을 골라서 참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참, 나는 걷기를 싫어하니까 하정우가 말한 ‘발바닥에서부터 허벅지까지 전해지는 단단한 땅의 질감’은 센터에서 스쿼트할 때나 느낄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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