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번 말로만 듣고 온갖 영화와 연극, 그리고 각종 사랑 이야기의 모티브로만 접했던 <로미오와 줄리엣>을 드디어 희극 형태로 읽었다. 희극은 고등학생 시절 문학 교과서에서 접한 <인형의 집> 이후로 처음이다. 희극은 시 다음으로 어려운 장르이다. 상상력이 부족해 장면을 보여주고 말하는 소설조차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데, 대사와 지문만으로 무대를 상상해야 하는 희극은 내게 정말 쥐약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전체 줄거리는 알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니, 사실 100% 안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다. 어릴적 축약본이나 만화로 이미 접한 작품이기도 하고 영화와 드라마에서 비슷한 이야기를 접했기 때문이렸다. 본래의 작품에는 내가 모르는 이야기라도 들어 있을까 기대했는데 그건 아니어서 조금 아쉬웠다.
작품에는 유치하면서 오글거리나 대사가 곳곳에 숨어 있다. 대사들을 문자로 읽으려니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려나? 아니면 2019년에 이미 닳을대로 닳은(?) 내 감정이 그런 감정을 불러오는 걸까?
로미오 그렇게 해봤자 절묘한 그녀 미를 더 곱씹게 할 뿐이야.
고운 숙녀 이마에 입 맞추는 행복한 가면은
검기에 뒤에 감춘 흰 살결을 떠올리지.
갑자기 실명한 사람은 잃어버린 보물인
소중한 시력을 잊을 수 없는 거야.
빼어나게 아름다운 아가씨를 보여 줘 봐.
그녀의 미모는 누가 그 빼어난 미녀보다
더 빼어난지를 알리는 주석밖에 더 되겠어?
잘 가, 넌 내게 잊는 법을 못 가르쳐. _1막 1장 230-238행
줄리엣 수천 번 좋은 밤 보내세요! (위에서 퇴장)
로미오 그대 빛을 잃고 나니 수천 배나 더 나빠요. _2막 1장 154, 155행
줄리엣 꼭 그리할게요. 그때까지 이십 년 같아요. 그대를 왜 도로 불렀는지 잊었어요.
로미오 기억날 때까지 서 있게 해 줘요.
줄리엣 그대를 거기 있게 하려고 잊겠어요, 얼마나 같이 있고 싶은지 기억하며.
로미오 이 집 말고 다른 집은 모두 다 잊으면서 그대가 계속 잊게 계속 서 있을게요. _2막 1장 170-175행
으으, 옮겨적으면서도 내 열 손가락이 펴지지가 않아! 하지만 이 대사를 연극 무대에서 읊는다면, 원본 그대로 영어의 운율을 살려 읽는다면 분명히 느낌이 다를 것이다(연극 전체의 대사가 하나의 시로 읽힐 수 있다고 한다). 또 서로에게 푹 빠진 이들에게는 이 느끼함마저 사랑스러움으로 다가오겠지? 지금은 진심에서 우러나는 말을 하지 못해도 이런 내용을 통해서 메마른 감성을 좀 일깨워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하는 아주 질 나쁜 생각을 해본다.
많이 알려졌듯이 로미오와 줄리엣은 10대 초중반이다. 둘의 나이야 16세기라는 시대적 배경을 감안하면 이해할만하다… 라지만 저 나이의 인물들이 서로의 사랑을 방해하는 것들에서 벗어나고자 독약으로 죽음을 위장할 생각까지 하다니. 게다가 캐풀렛 가문의 파티에서 눈이 맞은 후 죽기까지 겨우 5일 남짓한 시간밖에 흐르지 않았다고 한다. 첫눈에 반해 데이트도 거의 안한 것 같은데(적어도 작 중 묘사는 거의 없음) 두 가문 사이의 반목이 둘의 사랑을 더 불붙게 했을지는 몰라도 그것과는 별개로 참 대단하고 과감하고 불같고 낭만적인 인물들이었구나. 부럽다아-.
군주 이 원수들 어딨느냐? 캐풀렛! 몬터규!
하늘이 당신들의 기쁨을 사랑으로 죽였으니
당신들의 미움에 어떤 천벌 내렸는지 보라.
나 또한 당신들의 불화에 눈 감은 대가로
한 쌍의 친척을 잃었다. 모두가 벌 받았다. _5막 2장 290-294행
이 작품의 마지막 장을 덮고서는 해석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순수하고 열정적인 사랑 이야기로 볼 수도 있겠지만 반목하는 두 가문 사이에서 유일하게 순수했던 이들의 희생으로 서로 화해하는 이야기로 읽는다면, 세속적인 세상에 저당잡힌 순수한 이들의 존재 자체를 더럽히는 게 될까? 몬터규 가문과 캐풀렛 가문, 베로나의 군주까지 그들이 가장 소중히 여겼던 이들의 희생 아닌 희생으로 서로의 갈등이 봉합됐으니, 어른의 사정에 휘말린 로미오와 줄리엣의 기구한 운명에 애도를 표한다. 그래도 둘의 사랑이 한여름의 햇볕처럼 뜨겁고 강렬했음을 알기에, 나는 당신들은 아름다웠다고 감히 이야기를 건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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